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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Jun 12. 2022

無我가 뭔지 공부했다. 재밌었다.

anattan은 왜 非我가 아니라 無我일까?

학부생 시절 불교를 접했을 때, 혼란스러웠던 개념은 非我와 無我였다. 뭔가 비슷한 개념 같지만, 말을 풀어 보면 각 단어가 지시하는 바가 조금 달랐기에, 이것을 언젠가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고, 아래의 글을 통해 궁금했던 점이 조금이나마 해결됐다. 



2019년 어느 날에 찍었던 불상 사진. 

anattan은 왜 非我가 아니라 無我일까?

서론 


anattan(anātman)은 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이 가지는 함의는 無我(without self) 혹은 非我(not the self)이다. 단순하게 봤을 때, 無我라고 해석한다면 자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非我는 자아가 아닌 것을 부정할 뿐, 자아의 존재는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非我라고 말하는 건 마치 우파니샤드처럼 형이상학적 자아를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중반까지는 anattan을 非我라고 해석한 학자들이 여럿 있었으나, 90년대에 들어서는 非我라고 해석하는 것이 잘못됐으며, 無我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학설이 정론이 됐다. 여기서 든 나의 의문은 ‘과거에는 왜 anattan을 非我로 봤고, 지금은 無我로 해석한 근거는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 사상이 無我라는 걸 생각했을 때, 非我라고 주장하면 불교의 기본 사상에 관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위험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非我라고 번역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非我가 아닌 無我라고 했을 것이다. 

본론을 통해 과거 anattan을 非我로 해석했던 근거를 파악한 다음 현재에는 非我가 아닌 無我로 해석하는 근거를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非我로 번역한 이유와 그것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알고자 한다.

본론 

(1) 과거에 anattan을 非我로 해석했던 근거

非我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들은 anattā의 의미를 ‘자아가 없다’가 아니라 ‘자아가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 : sabbe dhammā anattā)라고 말하는 것은 일체의 법 속에 ‘자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체법은 ‘자아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라고 주장한다.1이는 무아설이 자아(我)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유도하며, 나아가서는 자아(我)를 인정하고 있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그는 이 구절을 통해 비아(非我)의 의미가 초월적 자아로서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빨리어 경전 니까야와 한역 경전 아함경에 非我를 언급하거나 非我적인 표현, 심지어는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표현을 통해 비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2

非我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들이 드는 또 다른 근거는 어원의 문제다. 원시불교의 빨리어 성전에서 無我의 원어 anattā는 산스크리트어 anātman이며, 이것이 문맥에서는 非我로 번역되는 데 반해, 非我의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없는 無我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nirātman, nairatmya, nirātmakatva, nirmama, nirmamatva 등이다. 그런데 이 nirātman에 해당하는 빨리어 niratta가 상응부 경전(saṃyutta-nikaya)에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반드시 無我의 의미로 취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그 외에 nirātman에 상당하는 말을 드는 빨리어 자료가 있음은 지적되지 않는다고 한다. 원시불교의 성전에서 무아설에 관해 사용된 말은 오로지 anatta(anātman)이니, 불교에서 이 말은 ‘나는 아니다(非我)’는 것이 원래 의미였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3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불교에서는 뭔가의 의미에서 실체적 원리인 我, 예를 들면 영혼과 같은 것을 상정하길 거부했다. 그리하여 그러한 철학적 입장에 서서 대상적인 뭔가를 ‘我’ 혹은 ‘나의 것’이라고 고집하는 집착을 떠나는 것을 그 실천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초기의 불교 및 대승불교의 후기에서는 그것을 진실한 자기의 실현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Stcherbatsky의 단어 정의처럼4, 무아설의 기본 입장이 실체적 원리를 부정하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진실한 자기’라는 실천적 차원의 ‘我’를 인정하는 것이 불교의 시작과 끝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는 불교의 본래적 교의는 無我가 아니라 非我라는 입장에서 非我의 실천적 의미를 피력한다. 그는 원시불교에서 我에 관한 견해는 아트만 이외의 어떠한 것도 ‘이것이 아트만이다’라든가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고 말하여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이러한 집착이 없다면 곧 해탈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무아설이라고 부르길 주저한다”라고 단호히 말하면서, 초기의 불교에서는 결코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는 설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5

그는 아트만은 대상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世人이 自我라고 잘못 상정한 것일지도 모를 대상적이고 객체적인 어떠한 원리나 기능도 사실은 아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트만은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떠한 것도 자기(아트만)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설을 통해 진실한 자아라는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고, 이를 세간 일반의 호칭에 따라 임시로 無我라고 칭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객체적, 실체적 혹은 기능적인 아트만觀에 반대했던 것이라는 입장이다.6

그는 ‘아트만이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에 관해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 원시불교 경전의 산문 부분에 나타나 있는 사상적 태도임을 언급한다. 그는, 이와 같은 태도는 초기불교의 時句 중에 이미 표현되어 있는 것이고, 산문 부분은 그 사상을 詳說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최초기의 불교가 자주 ‘나의 것’이라는 소유 관념을 버려야 할 것임을 가르치고 아트만에 관해서는 아트만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실현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데 대해, 산문 부분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아트만은 아님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후세에 이르면 산문 부분에 강조되어 있는 사상을 받아들여 드디어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아설이 확립됐다는 것이다. 7

나카무라 하지메는 원시불교의 성전 중에서 무아설에 관해서는 발전의 세 단계8를 인정할 수 있지만, 명확한 무아의 관념은 보이지 않는다고 파악한다. 그는 원시불교의 무아설이란 끝까지 非我로 표현되는 것이며, 이런 표현의 의의는 실천의 주체로서 我를 인정하는 데 있다.9

(2) anattan을 無我로 봐야 하는 이유 

임승택은 anattā의 주된 용도는 서술성 명사이며, 서술성 명사의 주된 쓰임은 주어의 성질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데 국한된다고 말한다.10 그는 anattan의 용법이 서술성 명사로 쓰이는 경우라면 無我 혹은 非我로 분석하든 의미 차이는 없다고 말한다. 먼저 그는 anattan 자체는 접두어 an(無, 非)과 일반명사 attan(我)으로 이루어진 복합어라고 말한다. 이 복합어는 “자아를 결여한다(without self, 無我)”라는 의미로도 혹은 “자아(‘나’)가 아니다(not the self, 非我).”라는 의미로 분석할 수 있다. 전자(자아를 결여한다)는 자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고 후자(자아가 아니다)는 자아, 혹은 ‘나’를 전제하고서 어떤 특정한 무엇이 자아 혹은 ‘나’가 아님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이 둘은 전혀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다.11

하지만 용어가 서술성 명사로 쓰이는 경우라면, 그는 둘 중 어느 분석을 따르더라도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전자는 “물질 현상 따위가 자아(‘나’)를 결여한다.”라는 뜻이 되고, 후자는 “물질 현상 따위가 자아(‘나’)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서술성 명사로 쓰이는 전제하에, 이 둘은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 현상 따위가 자아와 무관하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고, 그런 점에서 전자와 후자는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12

또한, 임승택은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sabbe dhammā anattā)”라는 말에 주목한다. ‘일체의 법’이란 유위(有爲, saṅkhata)의 경험적 요인들만이 아니라 경험의 차원을 벗어난 무위(無爲, asaṅkhata)의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상좌부 전통에서는 무위인 열반(涅槃, nibbāna)에 대해서도 무아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경험적 요인만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궁극의 경지마저도 자아 혹은 ‘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非我로 해석했던 나카무라 하지메가 말하는 실천적 차원의 나도 해당하는 말이다. 

임승택은 ‘나의 것’등을 부정하는 非我의 서술을 無我로 연결한 사례를 든다. 

비구들이여, 色은 무상하고, 무상한 그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인 그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그것은(yad anatā taṃ) ‘나의 것’이 아니고, 그러한 ‘나’는 있지 않으며,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13

임승택은 이 인용문에서 무아(anattā)는 色(rūpaṃ) 따위의 오온이 지니는 속성을 부연하는 동시에 관계사 yad 구문의 주어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구문을 지시하는 지시대명사 taṃ은 무아인 물질 현상 따위가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님”을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14

정승석은 나카무라 하지메의 의견을 일견 긍정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非我로부터 無我’라는 단계적 전개에 의문을 제시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는 것을 無我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非我의 我는 ‘진실한 자기’라거나 ‘행위의 주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승석은 ‘행위의 주체’라는 관념과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는 관념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나카무라 하지메의 말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非我의 我와 無我의 我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경우 즉 양쪽의 我가 동일할 경우를 생각해 보면, “我가 아니므로(非我) 我가 없다(無我)”고 말하는 것은 “我가 없으므로(無我) 我가 아니다(非我)”라고 말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부적절하다. 즉 無我는 非我의 전제가 될 수 있어도 非我는 無我의 전제가 될 수 없다. 15

그는 非我와 無我의 我가 같을 경우, “我가 아니므로 我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我가 없으므로 我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카무라 하지메가 말하는 非我에서 無我가 도출됐다는 식의 선후 관계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의견이다. 

 정승석은 『무아상경』에서 非我的으로 표현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16고 설한 점에 주목한다. 諸行, 五蘊이 無常이요, 苦라는 것은 ‘여실하고 바른 지혜로 보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지혜로써 관찰되어야 하는 것이지 凡夫的 견지에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五蘊은 그대로가 凡夫的인 본연의 상태로서 色受想行識이 無常이고 苦이며 無我임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립하는 세계다. 諸行이란 凡夫의 존재 방식으로 성립한 세계로서, ‘나는 있다’는 집착에 의해 성립하는 존재의 상태다. 諸行과 五蘊이 止滅한다는 것은 실체적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있다’라는 의미로 존재하던 상태가 ‘나는 없다’라는 바른 지혜를 통해 봄으로써 ‘나는 있다’라는 상태가 아니게 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17

그는 凡夫가 보는 현상 세계의 해명에 초점을 두면 我의 존재가 상정되어 있지만, 현상 세계의 극복에 초점을 둘 때는 我를 부정하는 無我를 말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我의 존재를 상정하는 非我的 표현은 我의 존재가 방편으로 있는 것이고, 바른 지혜로 여실히 관찰할 때, ‘모든 것에는 我가 없음(諸法無我)’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非我的 표현은 無我를 설하는 일환일 뿐, 사상적으로 구별할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18

결론 


anattan을 非我로 해석했던 이들의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히라카와 세이코는 anattā의 의미는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원시 불교 경전에는 非我를 언급하는 표현이 등장하며, 심지어는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2. 원시불교의 빨리어 성전에서 anattā는 무아의 원어이지만, 문맥에 따라 비아로 번역되기도 한다. 3. 나카무라 하지메는 ‘진실한 자기’라는 실천적 차원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 불교의 시작과 끝이며, 무아가 아니라 비아라는 입장에서 비아의 실천적 의미를 피력한다. 

anattan을 無我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임승택은 anattā의 주된 용도는 서술성 명사인데, 이것이 서술성 명사로 쓰일 경우 무아든 자아든 어떤 특정한 무엇이 자아와 무관하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니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임승택은 一切法無我가 궁극적 경지마저도 자아 혹은 ‘나’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2. 정승석은 나카무라 하지메가 말하는 ‘非我로부터 無我’로 발전하는 단계가 가지는 모순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무아상경』에서 말하는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고 설한 점에 주목하며 我의 존재를 상정하는 非我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無我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지혜로 보는 것임을 말한다.

연구를 통해 과거 非我를 주장했던 이들의 궁극적 목표가 불교의 원의(原意)를 찾는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불교의 사상적 특징이 無我인 것을 생각하면, 非我는 실천적 我, 혹은 진실된 我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anattan을 無我로 보는 것이 我의 존재도 부정하고, 바른 지혜로 세계를 파악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나름 진지하게 고민을 가지고 쓴 글이라, 명확한 출처가 어디인지 밝히고 싶었다. 불교의 我 개념에 관해 궁금한 이들은 아래의 논문들을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각주 

1) : 平川彰, 「諸法無我の法」, 1968, p.411

2) : 정승석, 「원시불교에서 비아의 의미」. 인도철학, 1993, p.58

3) : 이한성, 『무아상경에 나타난 무아 연구』, 동국대학교, 2013, p.17

4) : anātman이라는 말은 보통 ‘무아’로 번역되지만, 여기서 아트만은 사실상 인격(a personality), 자아(an ego), 자기(a self), 개체(an individual), 중생(a living being), 의식 있는 행위자(a conscious agent) 등과 동의어이다. 근거가 되는 관념은, 이 모든 명칭으로 규정되는 것은 무엇이든 실재하다거나 궁극적인 사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사실들에 대한 총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불교 철학은 그것들을 실재의 요소(dharma)라고 격하함으로써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무아’는 궁극적 실재의 존재(dharma)에 대한 부정적 표현일 뿐이다. 

5) : 정승석, 「원시불교에서 무아와 비아의 문제」, 1992, p.179 

6) : 각주 5)와 같은 논문, p.179

7) : 각주 5)와 같은 논문, p.180

8) : 1단계는 주로 게송(偈頌) 부분에 나타난 것으로 我(아트만)를 승인하고 있으며, 이 我는 ‘진실한 자기’라고 파악한다. 2단계는 초기의 산문 부분에 나타난 것으로 我를 부정하지 않는 非我로 표현되며, 이런 표현은 我執을 버리는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의도가 있다고 파악한다. 3단계는 후기의 산문 부분에 나타난 것으로 여기서는 ‘我는 없다’는 無我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 

9) : 中村元, 『自我と無我』, 1963, “불교의 실천이란 이상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현실적, 일상적 자기를 이상적, 규범적 자기로 바꾸는 것이지만, 이때 행동적 주체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자기이다.” p.48

10) :임승택, 「니까야에 나타나는 무아(anattan)의 용례와 의미」, 2020, p,66

11) : 각주 10)과 같은 논문 p,62

12) : 각주 10)과 같은 논문, p.62

13) : SN. II. 2. 2-4 등. “rūpaṃ, bhikhave, anicaṃ. yadanicaṃ taṃ dukhaṃ; yaṃ dukhaṃ tadanatā; yadanatā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ā’ti”

14) : 임승택,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 불교학 연구, 2021.12, p.10

15) : 각주 5)와 같은 논문, p.182

16) : 色은 無常이다 일체의 무상인 것은 苦다. 苦인 것은 無我이다. 無我인 것은 ‘나의 것(mama)’은 아니다. 이것이 ‘나(aham)’는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트만(me atta)’은 아니다. 이처럼 이것을 여실하고 ‘바르게 아는 지혜로써’ 보아야 할 것이다.

17) : 각주 5)와 같은 논문, p.186

18) : 각주 5)와 같은 논문,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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