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과 엑스트라 사이

지금은 그 어디쯤?

by 공감의 기술

유치원에서 아이가 연극 공연을 한다고 신이 났습니다. 이래저래 배역이 많다며 기분도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아이가 맡은 역할을 보니까 처음엔 주인공을 비춰주는 거울을 했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주인공 옆에 서 있는 나무가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주인공이 나가 싸울 때 맨 끝에 뒤따라 가는 병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배역을 맡았지만 단 한 번도 무대 중앙에는 서지 못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무대이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무대 저 뒤에 자리 잡은 역할이니까요.


열심히 해봤자 티도 안 나고,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쁘기는 엄청 바쁩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분장도 빨리 바꿔야 합니다. 변변한 대사 한 마디 없이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면서도 왔다 갔다 분주하기만 합니다.




흔히들 인생은 한 편의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목을 받는 주연이 있습니다. 주연 못지않은 비중 있는 조연이 있고 짧지만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조연도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감이라고는 거의 없는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말이 배역이지 영화의 수많은 장면 가운데 잠깐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자세히 봐도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되는 수많은 엑스트라이지만 엄연히 영화의 한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뒷모습이라도 살짝 나오지만 대부분은 까만 머리 하나가 점처럼 보일 뿐입니다.


주인공은 대개 한두 명입니다. 주인공 못지않은 배역까지 합쳐도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몽땅 독차지하는 주연들, 하지만 이들만 있다면 영화는 어설프고 재미가 없습니다.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 있어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집니다. 이름도 없는 대다수의 엑스트라의 존재가 없다면 영화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엑스트라가 있기에 조연이 돋보입니다. 조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연이 있어야 주인공이 빛이 나는 법이니까요. 어디 그뿐인가요? 영화에 빠질 수 없는 음악도 있어야 하고요, 조명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엑스트라이든 나름대로 제 역할에 충실해야만 영화다운 영화가 완성됩니다.


영화가 끝이 났습니다. 영화를 보고받은 진한 감동이 여운으로 남아 자리를 뜨질 못하겠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살고 싶고, 멋지게 인생 역전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 끝난 뒤 현실로 돌아온 지금 나 자신을 바라봅니다.


내 인생은 주연과 엑스트라 사이에서 지금 어디쯤일까?

아직까지 까만 한 점으로 사는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한때 주연을 꿈꾸었지만 이제는 주연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대사 한마디 없는 엑스트라보다 카메라에 곧잘 잡히는 조연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소박한 꿈인가요? 아님 이마저도 큰 꿈일까요? 혹시 엑스트라도 되지 못하는 운명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맡은 역할이 많다며 신이 난 아이처럼, 영화 속에 여러 짧은 배역으로 나오는 엑스트라처럼 사람이 사는 세상에 대다수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무대 중앙에는 서지도 못하는 배역이지만, 대사 한 마디 없이 잠시 지나가는 역할이지만 엄연히 영화를 이루는 장면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누구의 부모 자식으로, 어떤 이의 친구로, 어딘가의 소속원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각자 맡은 역할을 하며 세상을 돌리고 있으니까요.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지만 오늘도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관심을 끌지 못해도 주변부에 각자의 궤도를 돌며 세상에 버팀목이 되는 사람들이 훨씬, 훨씬 더 많습니다.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어제는 누구의 자녀로 응석을 부렸고 오늘은 누구의 부모로서 보람을 찾고 매일 어딘가의 소속원으로 땀 흘리며 살아갑니다. 이들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자기 인생의 주연들입니다. 관계를 맺고 사는 이 세상에 누군가의 조연이 되어 주고,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무대에서는 대부분 이름 없는 엑스트라로 한 컷 한 컷을 이루며 세상을 완성해 갑니다.

알아주는 사람 없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맡은 배역이 많아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는 배역을 기뻐하는 아이처럼 내가 살아가는 여기가 나의 중앙 무대이자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주인공입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는 세상은 어느 누가 주인공인지 전혀 관심 없습니다.

화려한 역할의 주연도, 감칠맛 나는 조연도, 단 한 장면에 온몸을 바치는 이름 없는 까만 점 하나에 불과한 엑스트라도 세상에 잠시 있다 가는 시간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비중보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합니다.


광활한 이 우주에 한 점보다 작은 지구 위에서

라이터 한 번 켰다 꺼는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갈 삶인데

주연이면 어떻고, 엑스트라면 또 어떻습니까?

까만 점으로 살다 가더라도 마음 편하게 내 인생을 즐기는 게 제일입니다.

주목받지 않아도 맡은 배역에 그저 신이 난 아이처럼 말이죠.

그러다 보면 엑스트라에서 단독 주연으로 비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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