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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차중 May 15. 2023

산성에 흐르는 이야기와 성마을 사람들

충청북도 청주 상당산성

천년 산성에 흐르는 이야기와 성마을 사람들-청주상당산성


1728년 이인좌는 무력으로 난을 일으켜 영조 대왕의 정권을 무력화하려고 한다. 이인좌는 청주를 함락하고 영조 직전의 왕 경종의 위패를 모시며 스스로 대원수가 되었다.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안성에서 패하고 한양에서 능지처참을 면치 못하였다. 이인좌의 나머지 세력은 상당산성 전투에서 관군에 의해 패하고 만다.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정조는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도입하게 된다.

상당산성 공남문

상당산성의 기원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백제시대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처음에는 토성으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과 이인좌의 난 등 여러 차례의 증축 개축을 거처 지금의 견고한 성의 형태를 갖추었다. 서쪽의 평지에는 청주읍성이 있고 주변에는 여러 산성들이 있다. 상당산성은 청주 인근 산성 중 가장 높은 곳이 있기도 하고 위치적으로 접근이 어려워 훼손이 덜 되어 산성의 형태가 잘 보존되었다. 1895년까지 군사가 주둔하였다고 하니 건물을 제외한 성곽은 조선시대의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성문의 정문 격인 공남문(남문) 앞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상당산성에 올라 지은 <산성에서> 시비가 있다.

김시습은 생후 8개월에 한자를 알고 세 살부터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다섯 살이 된 김시습을 세종대왕이 불러 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 상으로 비단 50필을 주었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많은 비단을 어떤 방법으로 집으로 가져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50필의 비단을 한 줄로 묶어 질질 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매월당 김시습 시비

산성에서

                                              김시습     

향긋한 풀내음이 산에 스미고

맑게 갠 풍경은 시원하기도 하여라

들꽃마다 벌이 날아와 꽃술을 물고

살찐 고사리에 비가 적셔 향기를 더하네

멀리 바라보이는 산하는 웅장하고

산성 따라 높이 오르니 의기가 드높구나

저녁 내내 이 풍광을 실컷 바라다보자

내일이면 곧 남쪽으로 떠날 것이니     


위의 시는 시비에 해석되어 적힌 시보다 더욱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글이다. 과거의 비슷한 계절에 김시습도 성당산성을 찾아 산성 어딘가에서 시를 짓고 있었나 보다. 내가 찾은 봄날이었나 보다.


남문 앞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상당산성도를 모사한 그림의 사진이 있다. 성곽의 보존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에 안내소에서 받은 지도안의 길과 별 차이가 없다. 휴대폰으로 상단산성도를 촬영해 지도로 사용하여 성 안팎을 걸어보기로 했다.


상당산성 성곽길

공남문으로 들어서 문루로 올라 성곽길을 걸으면 가파른 성곽 아래로 청주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구릉진 성안을 감싼 성곽 곳곳에 난 암문(暗門)이 있다. 비상시 드나드는 문으로 큰 성곽에 수수께끼 놀이하듯 아담하게 생겼다. 조선의 군사처럼 들락거려 본다.


이정표를 따라 서장대를 찾았다. 서장대는 동장대와 함께 성의 좌우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안내 표지판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숲 속 깊은 곳에 보물 찾기처럼 찾아 나선 서장대의 모습은 더욱 고풍스럽다. 건물은 높이가 높지 않아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넓은 정자처럼 보인다. 산성 동쪽에는 동장대가 있는데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며, 남문과 수문, 그리고 성 안쪽을 경계할 수 있는 곳에 서 있다. 서장대는 이 동장대와 마주하고 있으며 동장대를 엄호하는 진지의 역할도 있었을 것이다.


서장대
동장대

조선시대의 길이 그대로 남겨진 것 같은 풀숲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다시 성곽길로 올랐다. 커다란 암문처럼 생긴 서문은 커다란 돌기둥(무사석)과 돌로 된 보(장대석)가 특징이다. 출입구가 성벽의 무게와 압력에 견디도록 축성한 방식이다. 옛 지도에 초가집이 50여 채가 있는 곳인 성의 중심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초가집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현대식 주막인 민박과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틀림없이 성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데, 나는 성안에 주민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 전에 고창읍성을 다녀온지라 당연히 읍성도 아닌 산성에는 사람이 살지 않을 것이라 여기었다.


가게의 입구에는 30평 정도는 되어 보이는 넓은 너럭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는 “兵馬虞候申公泰羲永世不忘碑(병마우후신공태희영세불망비)”라고 쓰인 영세불망비가 있다. 병마우후 신태희의 공덕을 기린 선정비이다. 뒷면에는 “咸豊九年三月日立(함풍 구년삼월일립)”이라고 건립시기를 새겼는데, 함풍은 청나라 문종 함풍제의 연호이며, 우리나라 연도는 철종 10년인 1859년이다. 공덕비 큰 바위에 박혀있어 적어도 비석은 영세불망의 축복을 누릴 것 같다.

민가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는 주민도 보인다.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상가를 찾는 여행객들도 분주하다. 문화재 안에서 주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게 보이고, 그들이 또한 이 산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을 언덕 위 동장대에 올라섰다.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식당을 찾아 집집마다 자랑하는 순두부찌개를 안주 삼아 동동주 한 잔 마셔야겠다. 산성을 드나드는 시내버스 한 대가 여기가 종점인지 정거장에 도착해서 시동을 끈다.

종점 시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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