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가 지천명? 세상이 바뀌었는데!'하고 무시했다.
그런데 50대는 지금까지 용케 피해왔던 많은 것들을 겪으며,
억지로 마음공부하는 나이였다.
아직 몸도 마음도 젊지만 은퇴를 걱정하고,
아이들은 자라고, 부모님의 병환과 부재를 경험한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대단한 걸 이루지도 못한 50대의 어느 날,
은퇴 또는 실패로 강제된 시간이 생긴다.
삶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지난한 경험과 맞물리는 어느 순간,
세상 이치를 깨달을 가능성이 더 많아지는 것,
당연하지 않은가?
50대의 여행은 깨달음을 위한 여행이다.
이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행복했는지? 사랑했는지? 자유로웠는지? 길에 멈춰 장미향을 맡았는지?
인생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기 위해,
50대는 길을 떠난다.
2019년 부활절, 스리랑카 콜롬보 시내에 다섯 개의 폭탄이 터졌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일주일 전에 만났던 그녀도 떠났다. 곧이어 어머님이 떠났고, 아버님도 아프셨다. 그리고 코로나가 닥쳤다.
50대의 누구나에게처럼 나에게도 도처에서 죽음이 몰려왔다. 많은 길을 여행하며 '길에서 사고를 만날 수 있으니, 언제라도 후회 없이 살자'라고 마음먹었지만, 구체적 부재 앞에서 나는 죽음을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할지 오래도록 생각해야 했다.
위드코로나 여행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3월, 한국에 머물던 나는, 스리랑카행 비행기가 멈춘다는 소식에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그 해 여름 임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9월 스리랑카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6개월 후, 다시 동유럽 몰도바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코로나 와중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지치는 여정이었지만, 극명하게 다른 각국의 코로나 대응도 경험할 수 있었다. 코로나에 대응하는 방식은 유럽, 북미, 아시아 각 지역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정말 달랐다.
한국
3월 초, 중국에 이어 한국과 이탈리아가 처음 코로나의 타격을 받았던 그 때. 너무나도 낯설게 코로나로 텅 빈 인천공항에서, 영화 '반도'처럼 한국을 탈출하는 승객이 꽉 찬 비행기를 탔다. 한국인은 몇 명 없었다.
스리랑카
위험국 한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스리랑카에 도착하자 2주간 자가격리를 했다. 이틀 뒤 3개월간의 통행금지가 시작되었다. 스리랑카는 슈퍼마켓도 문을 닫고, 배달만 가능한 전면적 통행금지와 공항을 폐쇄하는 강력한 봉쇄로 코로나에 대응했다. 통행금지가 끝나자, 국내여행이 허가되었다. 공항 폐쇄로 폐업 직전 호텔들이 국내 관광객 대상으로 반값 할인에 들어갔다. 다행히 시작했던 박사 논문 현장조사를 끝낼 수 있었다.
미국
9월의 가을, 워싱턴으로 날아오자, 또 다른 세계였다. 미국은 정말 양극단이었다. 실내는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실외는 제각각이었다. CNN 방송은 연일 숫자를 보도하며 시끄러웠지만, 일상생활에는 스리랑카 정부의 강한 통제나, 한국의 암묵적 사회적 비난은 없었다. 생각도 달랐다. 나는 코로나 대응을 보며 아시아는 공동체 의식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몇몇 미국 사람들은 아시아가 농경문화라서 통제에 협조적이라고 했다, 통제는 자유가 훼손되는 간섭이었다. "사람들이 죽고 있잖아!", 미국은 사회격차로 전체적 교육 수준이 낮고, 이기적이라고 툴툴대며 몰도바로 떠났다.
몰도바
스리랑카에서 답답해하던 나는, 미국에서는 화를 내다가, 몰도바에 도착하자 포기하고 마음을 놓았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위드 코로나 비행, 여느 때처럼 마스크와 앞가리개까지 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던 나는 터키 이스탄불 환승에서 코는 내놓고, 입만 마스크로 가린 사람들과 몰도바로 가는 비행을 했다. 거리에는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넘쳤고, 버스 안에도 반은 코를 내놓았다. 쓴웃음이 났다. 방송에서 시끄럽게 떠들어서 가기 싫었던 미국은 정말 양호했다. 세상의 또 다른 어떤 곳은 떠들 여력도, 대응할 능력도 없어 조용할 뿐이었다. 코로나에 걸렸었다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매일 앰뷸런스가 시끄럽게 지나갔다.
위드코로나
마음을 놓자, 좋은 점도 있었다. 워싱턴에서 온라인으로 한 학기를 보낸 아이는 학교에 등교할 수 있었다. 아이들 중 반은 이미 코로나에 걸렸고 얼마 후 담임도 코로나에 걸렸다. 아이는 몇 번의 감기 증상이 있었지만 다행히 큰 증상은 없었다. 남편은 일 년간 재택근무를 했다. 논문에 집중해 1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차피 코로나로 갈 때도 별로 없었다.
그저 다른 선택일 뿐!
국가마다 다른 코로나 대응을 투덜거리고 비교하며, 일 년 반을 지냈다. 한국처럼 시스템이 가능한 곳은, 봉쇄 없이 대응했다. 스리랑카는 공항 봉쇄와 전면적 통제로 대응했지만, 올봄부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미국은 자유와 양분된 정치화에 갇혀, 백신으로 큰 불은 껐지만, 넘치는 백신으로도 잔 불은 끄지 못했다. 몰도바는 희생을 치르고 집단면역이 된 듯, 여름부터 마스크 없이 거리를 다니고, 해외도 다녀오며 위드 코로나로 살아간다.
국가의 대응도, 사람들의 상식도 참 달랐다. 여러 나라를 지나올 땐 이런저런 비판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어느 나라가 더 잘했고 못했고 따지기는 힘들었다. 국가마다 다른 사람, 체계, 능력, 문화에 따라,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대로 방역을 했을 뿐이다. 그 순간에는 더 나은 또는 더 나쁜 선택일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무엇이 최선이었는지? 다른 평가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도 내가 받은 교육, 문화, 상황에서 가장 나은 방향이라고 선택한 대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나? 지금 나에게 최선의 선택을 할 뿐,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었다.
각 나라의 코로나 대응이 달랐던 것처럼,
인생의 선택도 각자 달랐으니,
남의 선택에 뭐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겨울 여행
코로나는 여행자들에게 겨울이다.
여행을 떠나기도 힘들고, 떠나고도 힘들다.
겨울옷은 부피가 커서 짐도 무겁다.
차가운 바람은 숙소 밖을 나서기 망설이게 한다.
나도 모진 모스크바의 추위와 버몬트의 긴 겨울을 몇 해 겪어 겨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몇 해 꽤나 좋아했던 겨울 여행이 있다. 스키여행.
스키여행을 시작하자 겨울이 두렵지 않았다.
스키장이 개장하는 겨울을 손꼽아 기다렸다.
따뜻한 봄날은 스키장에서는 눈이 녹아 스키를 못 타게 되는 계절일 뿐이었다.
봄이 오는 것이 아쉬웠다.
그렇게 겨울 여행이 합리화되었다.
그런데 스키장엔 의외로 스키를 즐기는 6-70대분들이 꽤 많았다.
젊은이들도 한숨을 쉬며 포기하는 힘든 운동,
스키를 정말 편안하게 타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젊었을 때 스키를 배웠고 이제 힘을 빼고 천천히 즐기신다는 것!
코로나 시대의 여행처럼, 50대는 인생의 겨울이 살짝살짝 보이는 순간이다.
두꺼운 삶의 외투로 몸은 무겁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기도 두렵다.
하지만 50대 누구나에겐, 인생을 살며 쌓아온 지혜와 경륜이 있다.
경험에서 힘을 빼고, 50대의 나에게 맞는 슬로프를 찾아서 천천히 즐기며 내려오자!
코로나가 여행의 행복을 일깨웠 듯, 50대의 겨울도 인생 최고의 계절이 될 수 있다.
다 좋았다
남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을 조금 앞서 여행했다.
집을 나서면 모든 곳이 여행이었고, 모든 여행이 좋았다.
혼자 가면 친구를 만나니 좋았고,
함께 가면 외롭지 않아 좋았다.
돈이 적어 좋지 않은 숙소에 머물면,
부지런히 바깥구경을 하니 좋았고,
돈이 넉넉한 여행은,
편안한 호텔에서 샴페인을 마시니 좋았다.
떠나는 공항도 좋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좋았다.
혼자 앉아 듣는 음악도 좋았고,
사람들과 떠들면서 함께 가는 길도 좋았다.
사회생활은 조금씩 늦었다.
학교도, 취직도, 결혼도, 철도 늦게 들었다.
30대부터는 여행길에서도 왕언니였다.
나의 속도로 천천히 여행하며 살아오면서
크게 놓치고 지나온 것도 없으니,
그 늦음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여행길의 모든 것이 다 좋았다!
50대의 친구들,
인생의 성공과 실패라는
길 위의 모든 것을 힘을 빼고 즐기자!
지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나만의 속도로 겨울 여행을 떠나자.
그리고는 다시 봄이 오리라.
오히려 오는 봄을 막고 싶어 질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