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작업 May 29. 2021

ESSAY / 언어의 도수 (1)

술자리 단편선 : 지금의 자리는 몇 도로 이루어져 있을까

00.

평소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술과, 술자리와, 씁쓸한 목 넘김과, 곁들이는 것들을 사랑한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술의 종류와 곁들이는 안주는 매번 다르다. 혼자 마실 때면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를 안주 삼아 치킨에 맥주를 즐긴다. 혹은 난데없이 유튜브의 노래방 자막 영상을 틀어 놓고 흥얼거리기도 한다. 아무래도 넘쳐흐르는 흥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고. 하지만 오늘은 혼술이 아닌 타인과의 술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서로의 표정에 주목하며, 떠도는 대화를 마시는 사이 측정되는 관계의 도수. 나와 당신의 언어는 몇 도로 취해 있었을까.








01. 36.6℃

법의 테두리 안에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처음 만난 친구들이 있다. 당연히 법 밖에 있던 '술'은 입에 댈 수도 없던 건전하고도 청량했던 나날들. 지금 생각해보면 술 한잔 없이 어찌 그리도 높은 볼륨의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다 똑같은 옷을 입었음에도 제각기, 그리고 시시각각 참으로 풍부하고도 다채로웠다. 그러나 미룰 수 없는 수순에 따라, 세상의 모든 무해함을 표상했던 10대 소녀들은 어느덧 슬그머니 테두리 밖으로 내몰려졌다. 내몰려진 이들은 스무 살이라는 거침없는 타이틀을 목에 걸고 처음으로 술이라는 것을 마셨다. 술과의 첫 경험. 맥주 한 잔, 소주 한 모금에도 속절없이 찌푸려졌던 인상들. 아린 혀를 재빠르게 안주로 감싸며 어른들은 이런 걸 어떻게 먹냐며 반들반들 웃던 얼굴들. 그때의 우리는 아직 술과는 어색했다.



우리와 가장 어울리는 술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처음 술을 입에 댄 나이로부터 어느덧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 속에서 우리는 점점 술과 닮아갔다. 살아본 결과(물론 아직 30대도 되지 않은 애송이지만), 세상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고리짝 같았다. 어딘가에 취하지 않고는, 혹은 하염없이 한드작대는 정신을 붙잡지 않고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인식할 때면 늘 그랬다. 넘칠 듯 넘치지 않는 거대한 술통 속에서 푹 절여진 채 갈피를 못 잡고 흔들거렸다. 그 변두리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안식처를 찾고자 끊임없이 서로를 불러 내었다. 다행히 여전히 비지는 않는 오디오 속 우리의 대화 거리들은 애석하게도 점차 현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의 걱정 없이 웃던 모습은 점차 탁해지고, 모일 때면 오고 가는 고민이 잦아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일련의 모습들이 건강하다 느꼈다.



가장 피가 잘 통하는 사이가 아닐까 싶었다. 너희와 얘기할 때면, 내 몸의 굳어있던 혈액이 빠르게 순환되고 혈기가 도는 느낌이 든다. 어떤 템포와도 어울리는 우리. 빠르기를 확 올릴 때면 그에 맞게, 순식간에 낮추어도 여유롭게 적응하는, 모든 게 익숙한 사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이기에 서로에 대해 말할 때면 '그것도 기억 못하냐'며 종종 면박을 받으면서도, 그 나무람 마저 사랑스러운 에피소드가 되는 안락한 사람들. 안락함이라는 단어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유들유들한 사람들. 가끔씩 장난스레 날을 세워도 그 반대편엔 늘 무딘 날이 있음을 알기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들. 촘촘한 사람들. 나에게 학습된 사람들. 나를 점화시키는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우리의 도수는 36.6도쯤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의 체온인 36.5도에 우리 사이 공유되는 사랑을 0.1도만 더해, 딱 이 정도. 평균보다는 따뜻하나, 데일만큼 뜨겁지는 않은 적당한 관계. 고향을 생각하면 가족을 제하고 가장 우위에 떠오르는 아이들. 그래, 나에게는 여전히 너희가 아이들이다. 아무리 커버려도, 세상과 끝없이 마찰해도, 현실의 따가운 감도에 감정이 부식되어도. 10년 전 처음 만난 천진함은 내 머릿속 한편에 기록되어 있기에, 명백하게도 아이들이지. 36.6도의 아이들은 이번에도 다음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흐르게 될까. 메말라도, 범람해도 좋으니 지금의 온도만 가감 없이 유지되길.

작가의 이전글 ESSAY / 의식적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