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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주 Dec 28. 2020

2002년 뜨거웠던 여름, 그를 만났다

프롤로그

 2002년, 대한민국의 여름은 뜨거웠다.

그리고 나는 더 뜨거운 대학생이었다.


그날 밤은 2002 월드컵, 대망의 포르투갈 전이었다. 나는 온몸을 형형색색으로 치덕치덕 처바르고 시뻘건 티셔츠에 시뻘건 두건을 쓰고 학교를 갔다. 당시에는 그런 게 허용이 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축구를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나에게 월드컵이란 그저 대한민국 전체가 즐기는 국제적인 축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국 축구팀이 연달아 가져다주는 승리는 나를 광분하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박지성이 잘 생겨 보이던 그 시절, 그의 골은 대한민국 전체를 이 세상 너머로 붕 띄웠다. 그리고 나 역시 정신을 놓고 짐승처럼 포효를 하며 친구를 끌어안았다. 아니, 친구를 안은 줄 알았다.


한참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다 보니 내가 안고 있는 것은 내 친구가 아니었다. 키 크고 깔끔하고… 자세히 뜯어보니 피부까지 좋은, 그러니까 완전 내 스타일의 웬 생면부지의 남자였다. 아니,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런 사람을 내가 왜 이제서야 발견한 거지?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체격이 작은 내 친구랑 이 곰 같은 덩치를 어떻게 헷갈릴 수 있었는지부터가 살짝 의문이다. 아마도 박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상해졌었으니까… 내가 그를 끌어안은 채 눈을 꿈뻑꿈뻑하며 넋을 놓고 바라보는 동안 그는 자기 품에서 나를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뿔싸. 하늘이 주신, 아니 박지성이 주신 일생일대의 기회를 이렇게 날릴 수는 없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 만큼 이 남자도 그럴 것이다.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나는 함께 축구를 관람하던 내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도 당연히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2002년 여름이었고, 우리는 그 누구와도 함께 였으며, 니 친구가 내 친구고 내 친구가 니 친구인… 그러니까 그를 만난 그 순간부터 친구들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슬쩍 싸인을 줬다. ‘친구야, 우린 내일 보자. 안녕.’ 그리고 하늘과 박지성이 내려주신 그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친구가 외쳤다.

  

 “야! 이 미친년아!!!”


ㅇㅇ. 내 싸인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그는 하릴없이 딸려 나왔다. 아니, 질질 끌려 나왔다. 행여나 그가 내 손을 뿌리칠까 봐 손의 악력을 모두 사용해서 그의 손을 꽈악 잡았다. 그리고 무리에서 충분히 벗어났다 싶었을 때 그의 손을 풀어줬다. 그리고 말했다.


 “나랑! 여기서! 단 둘이서 봐요.”


그는 시뻘게진 손을 주물럭 거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뭘요?”

 “축구요.”

 “근데… 누구세요?”


응. 니 미래의 와이프…


2002 뜨거웠던  여름, 그렇게 나는 그를 만났다. 아니, 그는 나를 만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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