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 우울해라.”
박지성의 꿈같은 골로 대한민국은 포르투갈전에서 승리를 했지만 나는 우울했다. 박지성이 주신 인연을 놓치고 만 것이다.
나는 그날 축구를 관람하던 그곳, 학교 운동장에 그를 버리고 그냥 집에 와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술에 취해서 그의 존재를 완벽하게 까먹고 축구가 끝나기도 전에 집에 기어 와서 뻗었다. 젠장…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개다. (그래서 20년째 개임)
내가 다니던 대학교와 집과의 거리는 5시간이었다. 걸어서 5시간이 아니라 차로 5시간. 하여 나는 친구 없이 나 홀로 이 사랑스럽고 생소한 객지에 떨어졌으며, 친구는 여기서 새로이 사귀었다. 그렇게 새로운 무리를 만들어나가면서 낯선 타인에 대한 경각심 따위는 진즉에 내다 버렸고, 새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작은 문제점이 하나 있었으니, 내가 공대 중의 공대 기계공학과였다는 것이다.
성비율 40:1. 어느 방향으로 찍어봐도 비정상적인 비율이었다. 이건 남학생들에게도 속상한 일이었겠만 나에게도 꽤나 답답한 일이었다. 강의실에 나 홀로 앉아있으면 마치 뽀로로와 친구들 사이에 포켓몬 한 마리가 껴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거 같은 느낌.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런 과를 선택하였느냐고.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나는 수학을 잘했다. 그런데 그보다 국어와 영어를 못 해서 문과를 피해 이과로 도망쳐왔다. 그렇다고 예체능을 잘한 것도 아니었고…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체육을 못 했다) 그리고 마침 기계공학과가 취업이 잘 된다니 뭐 겸사겸사 그리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딱히 남학생들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노는 걸 좋아하는 뽀로로와 친구들이 뭐가 불편하겠는가. 그런데 막상 그들은 포켓몬을 불편해했다. 예상외로 낯가림이 심했다.
하루는 자판기 커피를 뽑으려고 줄을 서있는데 앞에 서있던 남학생이 내 커피를 뽑아주겠다고 나섰다. 그 친구 입장에서는 같은 과이니 친하게 지내자는 뭐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당시 교내 자판기 커피는 150원이었다. 그는 자판기에 200원을 넣고 커피를 뽑은 후, 잠시 고민하더니 그 커피와 잔돈으로 나온 50원까지 내 손에 쥐어주었다. 도대체 왜… 나는 내 손바닥 위의 50원을 보고 깨달았다. 언뜻 비슷하게 생겼지만 절대 한 화면에 공존할 수 없는 뽀로로와 포켓몬과의 간극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사실을…
하… 답답해져 왔다.
그래서 온라인 취미 동호회를 만들었다. 취미가 같으면 뭔가 통하겠지 싶었다. 모임 이름은 <책광>. 책책에 미칠 광, 독서 모임이었다. 회원은 느리지만 꾸준히 모집되었고, 8명이 채워지자마자 첫 정모를 제안했다. 회원들은 잠시 망설이다 그 제안을 승낙했다. 그날은 이탈리아 전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장소는 학교 후문 앞 작은 카페, 준비물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 한 권. 내 손에는 <셜록 홈스>가 들려있었다. 나를 책의 세계에 입덕 시켜준 <드래곤 라자>를 들고 갈까 하다가 첫 만남부터 개취를 강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다소 무난한 작품을 선택한 것이다.
한 명 한 명 카페로 들어왔고 그 들 역시 자신의 성향을 감추기 위한 위장용 책들을 들고 있었다. 이런… 책에는 왕후장상이 따로 없는 법인데… 늬들 이러기야? 라고 생각하던 찰나.
딸랑딸랑. 카페 문의 종소리와 함께 눈부신 후광이 들어오는 듯싶더니… 그가… 박지성이 이어준 나의 그가 들어왔다?? 왜지?? 뭐지?? 저 사람 언제 우리 동호회에 가입했지?? 아… 그딴 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두 번째 기회라는 것이었다. 하늘도 나를 돕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환호성을 삼키느라 뜨거운 커피를 원샷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보고 말았다. 젠장.
하… 나는 코난 도일인데… 너는 버트런드 러셀이라고?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건 뭐… 가까이 오지도 말라는 의미였다.
물론 동호회 회장 자리는 바로 다른 분께 넘겼다.
멀티에 능하지 못한 나에게, 책광은… 더 이상 독서를 위한 모임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지금 책이 중하겠는가. 나는 그를 또다시 우연히 만났다!!
이쯤 되면 우리는 운명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눈에만 잘생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