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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주 Jan 10. 2021

너는 나를 모른 척했어야 했어.

니가 박살 낸 거야. 내 브레이크....

<책광> 멤버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왔다.

우리는 나 자신과 나의 위장 책 그리고 취미를 소개하기로 했다. 모임을 만들었지만 모임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져버린 내가 첫타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기계공학과 xx 학번 김국주입니다. 제가 데리고 온 셜록 홈즈는 우울하면 코카인을 하고(나름 책 소개), 제 취미는 밤 중에 화분을 들고 가로등 밑에 서있는 것입니다.”


ㅇㅇ. 대략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날은 어둡고 취기라도 있었지… 지금은 뭐 멀건 대낮에 말짱한 상태로 그의 면전에 있으려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자기소개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일단 셜록 홈즈는 약쟁이가 맞다. 그리고 나는 당시 방열, 방음, 방충 그 무엇 하나 되지 않는 싸구려 자취방에서 친구 유진과 함께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셋 중에서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방충뿐이었다. 하지만 해충약을 남발한 탓에 벌레도, 우리도 함께 죽어갔고, 결국 유진이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했다.


바로 벌레잡이 식물, 친환경 해충 솔루션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것들이 절대 스스로 벌레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상가상으로 그것들 때문에 해충약도 마음껏 쓰지 못했다. 모기들은 밤마다 우리 집에서 축제를 했고, 그것들은 날마다 말라죽어갔다. 우리는 결국 직접 벌레를 잡아다가 그 상전들 머리맡에 바치게 되었다. 주종관계가 뒤집힌 것이다. 그렇게 벌레를 잡으라고 데려온 것들에게 벌레를 갖다 바치는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유진이 말했다.

 

 “야! 꾹! 우리 그러지 말고 밤에 울 애들 데리고 가로등 밑에 서있자! 거기 벌레들의 천국이자나. 벌레들이 알아서 울 애들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와우! 이런 똑똑한 또라이같으니라고…


그래서 우리는 매일 오밤중에 그녀가 ‘울 애들’이라 부르는 그것들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가로등 아래에 서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곳은 벌레들의 천국이었다. 덕분에 그것들도 포식했고, 벌레들도 포식했다. 우리는 매일매일 온몸을 뜯기며 흐뭇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저 자기소개는 영 헛소리만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니 나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 차올랐다. 살짝 수습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뭐… 박지성이 이어준 나의 인연만 괜찮다면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를 슬쩍 봤더니… 다행히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됐지 뭐…


그다음은 회장님 차례.


“안녕하세요. 저는 xx학번 성인애입니다. 취미는 여행이고요. 특히 책에 나온 지역을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요. 제가 들고 온 박경리의 토지는요...”


그리고 두어 명의 제법 정상적인 소개가 이어졌고, 드디어 그의 차례가 왔다. 마음과 눈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 공학과 xx학번 00율 입니다. 제가 가져온 러셀은 ;@;&;&;@;’ 제 취미는 ₩&:₩:@;!;@@:&.”


아차…경건하게 너무 얼굴만 쳐다봤다.

그가 뭔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듣지 못한 것이다. 애당초 러셀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취미는 물론 이름조차도 못 들었다. 이런… 그런데 뭐… 이름이 중요한가. 그런 건 차차 알아가는 걸로…


전원 자기소개를 마치자 주호 선배가 제안했다.


  “우리 맥주 한잔 하러 가는 거 어때요? 책이랑 맥주랑 콜라보 알죠?”


오케이. 책맥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린 근처 맥주집에 가서 시원하게 마시기 시작했고 곧 달큼하게 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해지면서 한 명 한 명 존댓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살포시 앉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질러 놓은 일이 많아서 일단 자중하기로 한 것이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날의 미친년이 나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 하게… 최대한 천천히…

그때 미주 언니가 툭 치며 말했다.


 “국주야, 너랑 나랑 취향 완전 똑같애. 국주! 우리 그냥 언니 동생 하는 거야! 말 놔.”

 “진짜요? 미주 언니, 나 그럼 말 놓는다?”

  “너 <뇌> 봤어?”

 “당연하지. 하, 베르베르 천재!”


그렇게 까르르 꺅꺅 거리는 동안 얼굴이 술에 달아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바람이라도 쐬야겠다 싶어 슬쩍 빠져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가니 술들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려던 찰나,


 “후배님?”


사래에 걸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서있었다.


“크헉억컥컥. 언제 나왔어욬컥컥.”

“방금요.”


와, 이 인간은 취하지도 않나. 어쩜 술을 마셔도 이렇게 하얗지? 그렇다면 얼른 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뽀얀 얼굴 옆에 서있으면 내가 삼계탕의 대추알처럼 보일 것 같았다.


“네… 그래요. 그럼 볼일 보세요. 전 들어갈게요.”


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그가 말했다.


“후배님, 나한테는 말 놓지 말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단 나는! 너한테 말을 놓을 생각이 1도 없었다. 그런데 저 말을 들으니까, 굳이 직접 나와서 시비를 터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선배님, 왜죠?“


그는 그날 수난받았던 손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아하? 너… 그날의 미친년이 나였다는 거 알고 있었구나?


 “선배님, 저 기억이... 나세요?”

 “어떻게 잊습니까? 이런 미친 사람… 아니, 이상한 사람을…”


오우케이. 작전 변경!!

이래나 저래나 나는 너한테 미친 사람일 텐데, 그렇다면 컨셉 변동 없이 그대로 직진한다. 풀악셀!!


니가 박살 낸 거야. 내 브레이크…

너는 오늘 나를 모른 척했어야 했어.


진짜로 키웠다… 식충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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