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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주 Jan 15. 2021

우리 엄마가 내 짝남을 삥 뜯었다.

그리고 인생을 배웠다.

율군, 드디어 그의 이름을 알아냈다.


더불어 부수적인 정보들도 입수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취향도, 성향도, 성격도 나와는 많이 달랐다. 아니, 많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정반대라는 개념 그 끄트머리에 각각 서있었다.

그런데 뭐… 그런 건 내가 차차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다. (20년째 못 바꾸고 있음)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그의 주요 출몰지를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바로 게임방이었다!


나는 그 출몰지 근처를 자주 서성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차마 들어가지는 못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지뢰 찾기 뿐이었다.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 사이에서 나 홀로 지뢰 찾기를 한다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전화할 수도 없었다. 스토커처럼 보이기는 싫었다. 무조건 우연을 가장해야 했다. 이런 나도 이미지라는 것이 있어서 우연히 마주친 척,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게임방에서 나온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팔짝 놀라더니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 저 샠…. 왜 도망가는 거지?? 그가 뛰니 나도 뛰기 시작했다.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나는 분명히 우연히 마주친 척하려고 했다.

이건 니가 먼저 시작한 거다. 넌 잡히면 디졌다. 학교 후문에서 정문까지 뛰어서 그를 붙잡았다. 막판에 점프해서 등에 매달렸다. 이판사판이었다. 이미지 같은 건 개나 줘버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후배님, 왜 쫓아와요?”

 “선배님이 도망가니까요.”

 “나.... 도망간 거 아닌데요?”

 “나랑 눈 마주치자마자 사냥꾼 만난 사슴처럼 뛰던데요?”

 “.... 하… 그런데 왜 쫓아와요?”

 “선배님이 도망가니까요.”

 “......”


그 후로도 그는 나만 보면 뛰었고 나도 뛰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그가 유산소를, 아니 운동을 드럽게 못 한다는 사실을… (20년째 못 하고 있다.)


근데 뭐든 그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일단 풀악셀을 밟기 시작했더니 내 앞에는 아우토반이 깔렸다. 나는 공식적으로 그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독서 모임에서도 당당하게 그의 옆자리를 요구했으며, 친구들은 그런 나를 위해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내가 뛰는 것 말고는 딱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를 위험인물에서 그저 귀찮은 인물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보 주의보 해제!! 동시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와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가기 시작했다. 야호!


하루는 방학을 맞아 고향을 갔다.

당시에는 고스톱과 채팅을 함께 할 수 있는 사이트가 유행이었는데, 나는 그와 그 사이트에서 채팅을 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신 엄마가 말씀하셨다.

 

 “딸, 나가서 우유랑 파랑 두부랑..(생략) 좀 사 와.”


 하여 나는 채팅창에다가 상황을 보고하고 나갔다.


국: 선배님, 나 좀 나갔다 올게요.


그리고 심부름을 하고 돌아왔는데... 내 자리에 엄마가 앉아계시는 것이었다.


 “엄마, 뭐해?”

 “응. 암것도 아녀. 근데 딸, 넌 왜 이렇게 시원찮은 놈이랑 노는겨?”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리셨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누르며 채팅창을 확인했다.


율 : 어디 가는데요? 후배님, 다녀와서 고스톱 한판 할까요?  
(2분 후)
국 : 나 국주 엄말세. 고스톱은 나랑 하게.
율 : 앗! 안녕하세요. 저는 학교 선배 00율 이라고 합니다.
국 : 고스톱 치는데 학벌과 이름은 필요 없네.
율 : 네, 어머님.


그렇게 그는 내가 심부름을 하고 온 15여분 사이에 우리 엄마한테 탈탈 털렸다. 엄마는 내가 돌아와서 자리를 비켜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더 빼먹을 것이 없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신 것이었다. 당시 그 사이트에서 우리 엄마의 등급은 신이었다.

ㅇㅇ. 우리 엄마가 내 짝남을 삥 뜯었다.


나야 오래전부터 또라이 이미지를 박았다지만, 이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선배님..... 우리 엄마한테 다 털렸네요?”

 “아니에요 후배님, 제가 봐드린 거예요.”


어… 그래요.


 “근데 이제 머니 없어서 어떡해요. 선배님…”

 “어머님께서 즐거우셨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따 자정에 500원 채워지니까 괜찮아요.”


그는 자정마다 500원을 채웠지만, 늘 한두 판 만에 다 털렸고, 영원히 머니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채워줄 수도 없었다. 나도 울 엄마한테 다 털려서 500원 인생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반강제로 고스톱을 끊고 인생을 배웠다.


그리고  시답지 않은 놈이 사위가 되었으니 우리 엄마도 인생을 배우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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