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의 삶, 사랑의 말

[읽고 나니까 쓰고 싶어져]

by 영랑

불구의 삶, 사랑의 말 –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양효실

현실문화

(초판 201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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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을 가진, 책들이 있다.

내 머릿속을 떠돌던 관념들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발견해 준 고마움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거였다는 동질감과,

결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함께 몰려오는 문장. 문장들.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내 삶을 이끌어 온 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이야기하는 태도였다.
– 장 주네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좀 불편하고, 아프고, 슬프고, 불안하면서도 벅차다.

나를 야생에 그대로 세워놓고 따뜻한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는 책.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거칠고 쓸모없고 아직도 떨고 있는 미숙한 것을 사랑하도록 하는 책.


양효실은 대학 강의에서 만난 학생들을 생각하며 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나 세대와 관계없이 세상과의 불화를 감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감각이 고통이라면, 누구나

그래서 때로는 분노하고 또 무기력하고 또 스스로 고립되어버렸다면,

오히려 그 점을 아낌없이 존중하고 옹호하는 책.


책 표지에 ‘에세이’라고 쓰고 있지만, 음악과 시와 예술가들을 경유한다는 점에서 비평이기도 하다.

김소연, 실비아 플라스, 김언희 그리고 장 주네...그들의 문장이 지나치게 감각적으로 되살아난다.

내일의 비평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고민하는 나에게 하나의 샘플이 되어주기도 하는 소중한 책.



메모한 문장들


p25-26

사회화에 성공하지 않는다면 존재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고, 지나치게 사회화에 성공한다면 존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성 사회의 역할에 자신을 맞추기를 당연시할 때 개인의 존재, 욕망은 보호받지 못한다. 사회가 원하는 생산인구,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는 ‘want to be’의 의식이 필수적이다. 존경하는 누구처럼 살고 싶다는 것,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것은 긍정적인 자아 이미지를 기존의 사회 매뉴얼에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닮고 싶은 사람이나 삶이 공동체 안에 없다는 것은 그 사회에 크나큰 손실이기에 앞서, 개인에게도 엄청난 고통이다. 꿈이 없이 현재를 통과하고 있다는 불안은 끊임없이 꿈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이미 스스로에게 루저라는 낙인을 찍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꿈이 없다는 것은 사회가 정해 놓은 역할 중에 자신의 존재를 집어넣을 거푸집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 경쟁이란 단어는 다양성이 없는 세계, 추구할 만한 역할이 극히 제한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 닮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개인에게 엄청난 고통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존경한다는 것과 닮고 싶은 것은 다르다. 참담한 세상이다. 검정치마의 노래가 떠오는다. "이 시대는 아직 나를 위한 준비조차 안 된걸요.


p66-68

나는 탄생의 축복이란 문장만큼이나 탄생의 비참이란 묘사가 일반화되길 바라고 있다. [...] 나는 나를 인수한 이들의 이해관계 혹은 사랑(!)에 맞춰 조율될 것이다. [...] 나를 아들이나 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적/문화적 맥락 안에서 나와의 만남을 조정할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환대하는 부모나 친족의 뒤에는 사회 공동체, 더 정확히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권장하고 강요하는 경제적/정치적 공동체가 있다. [...] 그러므로 태어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의 욕망이고 삶이다. 그들은 내게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본다. 아니, 그들은 내게서 그들이 원하는 있는 만큼만 알아본다. 그들이 알아보고 사랑하는 나는 단지 그들(의 일부)일 뿐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 투사한 이미지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그것'이 멀리서 왔다는 것을 외면한다. 모르는 존재가 친밀한 사적 공동체로 유입되는 데 갈등이나 협상은 없다. 부모라 불리는 이들의 무지와 단순함은 친밀한 가족을 이루는 전제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건네는 폭력으로서의 사랑과 무지에 근거한 따듯함을 일방적으로 떠안는다.

==> 나이를 먹으니 주변에 육아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비슷한 또래의 어린이들을 가까이서 보게 된다. 처음엔 탄생에 대해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부모의 생각과 선택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휘청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p166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시적이고 미적인 언어를 배우는 일이라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이해와 소통이라는 사회적 효율성의 언어가 아니라 무로서의 생에 충실한 미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 기성의 사회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서만 사회에 기여하는 예술의 가치를, 허약하게 남은 인간의 자취를 따라가며 삶을 음미하는 법을, 그러므로 사회가 가르친 두려움과 공포를 거부하고 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p174-175

도덕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판단 체계 안으로 당신의 말과 행위를 포섭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판단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도덕은 존재하고 느끼는 대신에 초월적인 권위와 시선으로 말과 행위를 수직적 서열 속에 위치시키는 데 몰입한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으로 존재를 재단한다. 반면 판단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행위하는 윤리의 맥락에서 인간은 안에 머무를 뿐, 바깥에 의지하지 않는다. [...] 판단이 불가능할 때 남는 선택지는 지금 일어난 것의 일회성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프레임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제외한 채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저 사람은 저런 이상하고 끔찍한 행동을 했을까?”라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프레임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일으킨 저 사람은 누구인가를 계속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 정의로 무장한 법이나 가치로 무장한 도덕 없이 오직 일어남이라는 일회성 안에 머무르려는 이러한 윤리는 그 자체로 미적이다.


p188-189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가치와 의미로 가득 찬 세계에서 한낱 도구로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의 소외는 필연적이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학대하고 착취하는 이 세계를 위해 동원될 것이 예정되었다. 이때 니체는 우리가 근대를 횡단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 더 놀고 더 소비할 시간을 더 안전한 조건 하에서 쟁취하려는 포스트산업적 욕망을 따르기보다는, 놀이와 일상,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를 긍정하는 것이 더 긴급하지 않을까? 지금 살아 있는 나,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 이렇게 유일무이한 내가 밧줄을 타고 허무의 심연을 건너는 법을 창조하는 것이 내가 나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허무한 이 세상을 건너는 법에 대한 나만의 스타일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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