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의식적인 무의식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지나치게 솔직하여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도통 외모이든지 사상이든지 꾸밀 줄을 몰랐으며, 오히려 인생과 인간성을 단순화시켰고, 수식이 없는 자연과학으로 역주행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살펴볼 쇼펜하우어의 인생과 사상, 그리고 그의 작품은 여느 때의 다른 작가들과 같이 심히 방대하기에 일부분에 천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쇼펜하우어는 소문난 여성혐오주의자였다. 혐오의 기준을 남성 혹은 자신, 아니면 양자 모두에게 두었기에 그의 여성에 대한 평가는 별 가치가 없고 천박하기까지 하다. 그가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닐 수 있어도, 애초에 부정의 렌즈를 낀 안경을 집어들어 여성을 바라보았기에, 일관되지 않고 여성과 그 외의 것들에 대해 선택적 냉정을 취하는 그의 가치에 공감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같은 종(種)임에도 불구하고 그 성향이 너무나 달라 다른 종으로까지 의심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필자도 쇼펜하우어와 의견을 같이 한다. 당연하지만 이 두 종(種)간에 있어 서로간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필자는 굳이 선택을 한다면 여성이라는 종(種)의 우위를 말하고 싶다. 현대사회에서는 ‘힘’, 즉 순발력, 추진력, 지도력 등과 같이 어떠한 능력보다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감정이나 태도, ‘정보를 수집 및 분석하여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가장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남성과 여성은 소련제 미그(MIG)기와 현존 최고의 전투기인 F-22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물론 남성과 여성을 이와 같이 일반화하기에는 같은 성별 내에서도 다채로운 성향이 돋보이는 요즘이지만, 최소한 필자를 평균 남성으로 상정하였을 때 위의 비유는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신론자인 필자의 신앙관에 있어서도 남성 이후에 창조된 여성이 새롭게 설계된 모델로서 하이테크 신기능을 탑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신제품이 우수하지 않던가!
쇼펜하우어는 그의 모든 사상에서 신(神)을 배제하였다. 이 배제는 마치 학교나 직장에서 누군가가 동료를 따돌리기 위하여 의식적이고 어색하게 못 본 척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연기는 절대자의 개입과 관심을 간절히 부르짖는 절규와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는 그의 말과 사상에 있어서 결코 자살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자살이 아니었다. 1860년 폐수종(肺水腫)으로 별세하였고, 예전에 살펴보았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도 이 폐수종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사실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독일의 쇼펜하우어는 무신론자인 것을 비롯하여 자극적인 말로 사람들의 가치체계를 충격하여 흐트러 놓는 전략을 구사하는 등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훨씬 이전의 인물이었던 쇼펜하우어는 특히 이기적인 염세주의자로 불리운다. 여타의 사상가들이 조곤조곤 논리적으로 독자의 가치체계를 그루밍(Grooming)하며 시나브로 침잠하여 온다면, 사르트르와 쇼펜하우어는 매우 거칠고 포악하게 독자를 다룬다.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이 일방적으로 목소리와 행동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인데, 의외로 이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행복론을 아래와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인생관에 의하자면 쇼펜하우어 본인도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았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허무주의적인 인생만을 산 것도 아니었다. 나름 열정이 있었고 치열하게 세상 속에서 싸워가며 자신만의 성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진정 ‘이기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마치 기말고사를 앞두고 주변 친구들에게 ‘인생 뭐 있나? 그냥 놀자!’라고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신은 방에서 밤새도록 공부하는 학생과 같이 말이다. 남에게는 염세와 허무주의를 심어놓고 자신은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여 다른 기준으로 이해하는, 그러한 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아돌프 히틀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자신을 사랑하였음에 반해 타자의 고통에는 둔감하고 냉정했던 히틀러는 내면을 정제하여 절제된 삶을 살았다.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여자에 대한 음담패설, 농담, 잡기 등을 멀리하며 독서에만 열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히틀러는 방공호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그의 사상을 흠모했다. 악(惡)이란, 절제된 경건 속에서도 얼마든지 자라날 수 있다. 아니, 진정한 악은 경건과 절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인생은 고통이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죽음을 찬양했던 쇼펜하우어. 필자의 이 글 또한 요즘에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몰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부정적인 면만에 천착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쇼펜하우어를 있게 한 것이 이 음영(陰影)이었기에 이 부분을 도려낸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의식적인 무의식으로 절대자의 사랑을 갈구하였던 쇼펜하우어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죽음이 ‘끊임없는 영면’이 아닐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절규하였고, 아마 지금도 절규하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