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무 Mar 06. 2021

나는 나와 헤어지기로 했다

존경하는 판사님께

나는 아빠와 좋은 친구사이였다. 큰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말을 일부러 충실하게 따른 것처럼 생김새도, 식성도, 습관 같은 것들이 참 많이 닮은 부녀지간이었다. 아빠에게 사람이 많이 따르는 것도, 유머러스함에 넉넉한 웃음이 많은 것도 참 좋았다. 우리 집에 재난이 연이어 닥치기 전에는 말이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는 밥숟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얘기했다. 자식들을 위해, 가족들만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너무 불행했는데 나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더니 마음이 아주 편하다고. 자식에게 온 기대를 걸어 미래를 저당 잡힌 부모를 원하지 않았던 나는 아빠의 선언이 마음에 들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어깨를 맞대어 가며 아빠 개인의 삶을 즐거이 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아빠는 가족에게서 벗어나겠다는 고해성사를 그 날 미리 했던 것이다.


아빠는 내가 좋아했던 아빠의 좋은 점을 좇아 가족과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무거운 책임감을 발휘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의 사람들과 사는 삶을 택했다. 아빠 한 사람만 오롯이 책임지면 되는 삶. 아빠의 실수는 두 자녀가 미성년자로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시기에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아빠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날 자취를 감추었다. 아빠를 사랑했던 만큼 깊이 미워하게 된 나는 아빠를 기준으로 사랑이라는 감정과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관한 많은 것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를 떠올리게 하거나 아빠와 깊게 연관된 것들을 매몰차게 지워버리고 싶었다.


2019년의 5월에도 나는 개명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름 하나는 끗발 나게 잘 지었다고 어린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주름진 어른들과 그런 나를 무릎에 앉혀놓곤 허허실실 웃고 있던 젊은 아빠. 거울을 보면 나를 사랑했던 젊은 아빠의 얼굴이 떠오른다. 스물몇 살이 되어서도 '우리 강아지', '우리 공주'라고 하며 뺨을 어루만지고 귀 뒤로 머리를 연신 넘겨주던 고모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리고 내게 '애도'의 개념이 자리잡기도 전에 떠나버린 할머니에게까지 그리움이 사무친다. 흠뻑 퍼부어주는 사랑의 감각을 갖게 해 준 이들은 아무도 내 곁에 남아있지 않다.


나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로 이름을 남겨두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홀가분해지고 싶다. 아빠와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에 들어했지만 이젠 그 출처를 모르게 지워버리고 싶은 내 이름. 주어진 삶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30여 년을 살았으니 앞으로의 30년은 내가 내게 준 이름으로 살고 싶었다.


2021년 2월 19일, 날씨가 너무 좋았다.


법원의 종합민원실에서는 단일 창구에서 개명과 협의 이혼을 동시에 접수받고 있었다. 여러 관계의 재창조가 일어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원 내에 있는 은행에서 사건 접수를 위한 인지료와 송달료를 입금하고, 서류 접수를 위해 번호표를 뽑고 계속 꾸깃거리며 순서를 기다렸다. 내 번호가 기계음으로 호명되어 창구로 가서 서류를 제출했다. 골무를 끼운 손가락으로 서류를 심드렁하게 넘기는 공무원의 표정을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애쓰다 시선을 옮겨 창구 근처에 붙어있는 주의 사항 내용을 읽어보았다.


협의 이혼 신청 시, 미성년자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친권과 양육권에 대한 협의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볼펜으로 내용을 긋거나 수정테이프 사용은 절대 안 되니, 내용이 틀리면 아예 새로 작성하라고 되어 있었다. 어디선가는 피해아동보호계획서 어쩌고 하는 내용이 들려왔다. 얼마 전 퇴사한 직장이 이런 개념들을 다루는 곳이라 진절머리가 나려고 할 때 공무원이 "3개월쯤 걸려요"라며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이혼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오래 걸려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없어 조금 안도했다.


개명 신청을 할 때는 별지로 개명 사유서를 첨부할 수 있다. 검색 창을 통해 '먹히는' 사유서의 조건을 확인하고 일상생활의 불편함, 성명학적인 이유 등을 버무려 (무려) 자필로 작성해서 제출했다. 하지만 내가 사유서에 적어내고 싶었던 정직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존경하는 판사님께,

사건 본인 OOO은 위와 같은 사유로 개명을 신청합니다.



개명도 '사건'으로 처리가 된다.



이제 기다림만 남았다.

작가의 이전글 구원하는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