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무 Apr 06. 2021

기쁨과 슬픔

<미친, 오늘도 너무 잘 샀잖아>를 읽고


이미 퇴사해버렸지만


예전 직장에서 나는 자주 울었다. 업무 조정에 대한 팀의 의견을 달래서 냈더니, 그건 지금 이야기 할 게 아니라고 팀장이 내 의견을 쳐냈다. 그 팀장은 옆 팀 팀장도 아니고 내가 속한 팀의 팀장이다. 별로 쳐낼 말도 아니었는데 사사건건 감정적으로 툭 튀어나온다. 팀이 바뀌고 내 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건가? 기분 잡친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있는데, 동료 한 명이 와서 괜찮냐고 묻는다. 그 말에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이 한탄으로 이어졌다. 지난 수 개월간 녹록치 않은 직장 내 사람들을 견뎌야 됐었다. 최고 관리자가 나에게 그랬다. 나는 할 말이 있을때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기대를 받으면 충실히 부응해야 하는 미련함에 내가 작성한 회의록을 내 뒤에서 트집잡는 파트너 직원과도 융화 되려고 애써야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파트너의 절친한 직원이 내 면전에서 쌍욕을 했다. 상식적으로 이야기를 해봤자 먹는게 욕이다. 그때 제대로 더 분노했어야 한다.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조직은 그에 맞는 처분을 내렸어야 한다. 조직 내에서 잘못 굴러가는 일은 인정에 기대어 해결할 것이 아니라 조직의 규율에 맞게 처리하면 된다. 그러라고 취업규칙 있는 거 아닌가요?


어쩌다 사람 좋아 보이는 죄를 받아 수모 아닌 수모를 겪었다. 구 파트너를 거치고 나니 조직이 개편되어 팀장이 변경되었고, 그 역시 악명이 만만찮다. 산 넘어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왜 버텼을까? 최고 관리자는 조직 개편 초기에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팀장 잘 다독이고 대화해가며 일해보자고. 면담에서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저 안할래요. 저는 이제 더는 애쓰고 싶지 않아요. 대화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에게만 하고 싶습니다.



일터에서 생각나는 게 죽음 뿐이라면


왜 사는 걸까, 생각이 이런데까지 미친다. 명치께를 무언가 누르는 답답함이 며칠 가시지 않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스트레스가 극도로 높다는 걸 몸이 또 이야기한다. 끈적하게 고여있는 속 안의 것을 뱉어버릴양 숨을 쉬어보면서 들숨엔 퇴사를, 날숨엔 죽음을 생각한다. 이까짓 회사 관둬버리자 근데 관두면 뭐 해먹고 살지? 모아둔 돈도 티끌모아 티끌인데. 그럼 어딜가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거 아닐까. 이렇게 티끌을 벌어 티끌을 모을 인생이라면 왜 태어났을까. 당장의 감정에 매몰된 머리가 논리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비합리적인 생각을 마구 뿜어내며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려고 한다.


동생과 한 번 갈등이 크게 있었던 때가 있다. 화해를 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 느낀 공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나보다. 수틀리면 언제고 이 집에서 나를 내쫓을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하루라도 돈을 빨리 모아서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에 불씨를 당겼다. 이건, 온전히 나만의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라기보다 처참한 모습으로 나동그라지는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한 달에 버는 돈은 비슷하게 들어오는데, 더 큰 돈이 빠르게 모일리가 없다. 알면서도 계속 불안한 것이다. 길바닥에 나뒹굴게 될까봐.


나는 너무 죽음을 쉽게 생각한다. 실천의지가 없는 죽음이라 다행인걸까.


이전에 동료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사람 기준에서나 너를 조진다고 생각하는 거지, 너만 괜찮으면 넌 팀장에게 당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는 말.  바다의 물결은 어떻게 흐를지 조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타고 있는 배의 닻이 향할 방향은 정할 수 있다는 말도 생각났다. 지금 당장 내 기분을 좋게 할 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불현듯 글쓰기 동료가 출판한 글의 일부가 생각났다. 거창한 포부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소비 하나로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다는 말. 그저 내일의 나를 생각하면 된다는 것.  살까, 말까 망설이던 사소한 것에 돈을 써 보기로 했다.


나는 밥을 좋아하지만, 마음이 허할 땐 왠지 빵을 사게 된다. 먹고나면 후회할 것 같아 몇 번 망설이다 집에 돌아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 날은 망설이지 않고 퇴근길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빵집에 들러 빵을 샀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쇼핑몰에서 휴대폰 케이스를 샀다. 계산하자마자 포장을 뜯어 새 케이스를 씌우고 생경한 핸드폰의 감촉과 시린 손 끝에 느껴지는 빵 봉투의 무게감이 허전한 마음을 흡족한 온기로 채워주었다.



정말, 오늘도 너무 잘 샀잖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행복한 소비에 영감을 주었던 글쓰기 동료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디엠을 보냈다. 동료의 글을 생각하며 돈을 썼다는 메세지에 무엇을 샀는지 질문이 돌아왔고, 빵과 핸드폰 케이스를 샀다고 했더니 빵과 폰케이스는 0원이라는 호쾌한 답이 돌아왔다.  마스크 안으로 껄껄 웃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지런히 손만 씻고 빵을 한 입 물었다. 거울에 새 폰케이스가 비치도록 사진을 찍고 귀여움을 뽐내고 싶어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다.


계산하고 받은 영수증을 합하면 도합 17,800원의 소비였다. 그렇지만 빵과 폰케이스는 0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맛있게 먹었으면 0칼로리, 내 마음에 들었으면 0원이라는 말은 과식과 과소비에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기 위한 적당한 기름칠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그 해석을 조금 달리하고 싶다.  내가 좋으면 그만, 지금 좋으면 그만이라고.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아니면 그만이라고. 누가 또 무례하든, 그 무례함의 화살을 나에게 겨누지 않게 화살을 부러뜨리면 된다고.


'기쁨'과 '슬픔'은 글자로는 서로 지닌 자음과 모음이 확연하게 다른데, 감정으로는 만 원짜리 두 장으로도 그 분류를 달리할 수 있다. 망설이던 빵의 첫 한 입으로 죽음을 연기할 수 있다면, 그냥 실컷 빵을 먹도록 나를 놔두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던 에어팟 프로를 샀다. 음악과 나, 우리 둘만 세상에 남겨진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카페에 앉아있을 수 있는 순간이 오길 기다려본다. 소음이 차올라있는 카페에서 오롯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때를 맞이하기 위해 그만큼은 더 살아볼 작정이다.








행복한 소비에 영감을 준 글쓰기 동료의 책을 소개합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글이든 모으는 것보다 일단 쓰는 게 좋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은 바로 산다.오늘의 행복을 아껴서 내일 좀 더 행복한 것은 싫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2275076



https://brunch.co.kr/@cotton100


작가의 이전글 경멸의 마지노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