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리만치 비장한 개명 후기
최근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는 책을 제목만 보고 구입 했었다.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 둔 건지,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 둔 건지 어디에 방점을 찍으면 좋을까, 책이 배송올 때까지 그 내용을 계속 궁금해했다. 나는 죽음을 곧잘 생각해왔지만, 정말 죽으려고 실천에 옮겨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나도 내가 왜 죽음을 자주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사실 책의 주된 내용은 내가 짐작한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제목만 보고도 책을 냉큼 구입할 만큼 내가 이 주제에 몰두해 있나보다 싶었다.
몸과 마음이 몹시 고단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을 벗어나는 방향을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왜 죽음을 자꾸 떠올리는 걸까. 불현듯 중학교 체육 교과시간에 배운 이론 한 가지가 어설프게 떠올랐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힘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두 물체 사이에 쌍으로 존재하며, 두 물체가 서로에게 작용하는 힘의 크기는 같고, 방향은 서로 반대로 작용한다는 것. A가 B에 힘을 가하면 B는 같은 크기의 힘을 반대 방향으로 A한테 가한다는 것.
죽음과 생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쌍으로 존재하는 힘이 서로 간에 있는 것. 방향은 서로 반대로 작용하고 있고, 죽고 싶은 때가 오거나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은 사실 살고 싶은 순간이었고, 생을 더 고민하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죽음을 밀어내는 크기만큼 죽음이 자주 내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살고 싶은 사람이구나.
엄마와, 나와, 동생과의 관계를 단절한 아빠가 지어준 이름은 사라지지도 않고 남아 나를 너무 괴롭게 했다. 친구든, 연애 상대든 끝난 인연과의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는 내게 아빠가 지어준 이름은 불릴 때나, 내가 내 이름을 소개해야 할 때 마음 한 귀퉁이를 건조하게 갉아내는 것 같은 기분을 안겨주었다.
이런 이유로 이름을 바꾼다는 말을 듣고 “그런 이유라면 성씨를 엄마 성으로 바꿔야지, 이름만 바꾼다고 될 일이냐”는 몰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내가 가부장제를 반대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고 내 이야기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애초부터 내가 개명한 이유를 그에게 납득시켜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여분의 설명 없이 대화를 끝냈다.
무엇이 좋고 나쁜 삶인지는 잘 모르겠다. ‘잘’ 살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편안하다 여기는 삶이 살고 싶어졌다. 태어나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는 내 의지로 조절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아니, 이름을 정한 것이다. 새 이름을 두고 누군가는 바꾸기 전 이름이 더 좋았다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괜히 개명 신청을 했나? 불쑥 드는 검열의 고개를 잽싸게 눌러주었다. 개명 전 이름을 더 좋아하든 말든 주변인들의 호불호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글을 쓰러 오는 길, 빗길을 뚫고 우체국에 들러 법원에서 보낸 개명 허가에 관한 등기를 수령했다. 가방에 들어있는 산 지 얼마 안 된 노트북보다 이 등기 하나가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신청한 지 1개월하고 열 흘 정도만에 삼십 년간 지니고 살았던 이름의 개명이 허가되었다. 사실 이름 같은 건 애초부터 별 거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름을 바꾸었다고 무언가 극적으로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위해 실천을 하고 그 결과를 얻어냈다는 경험이 생겼다. 내가 나를 어떻게 설명할 지를, 어떻게 불릴 지를 선택했다. 새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이후의 삼십 년의 인생은 이 경험에서 얻은 홀가분한 감각이 토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 이루어지진 않더라도 원하면, 의지를 발휘 해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