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여성 배구 동호회가 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멋지니까 무턱대고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만 생물학적 나이로 아슬아슬하게 동생인 김연경 선수를 비롯해, 한국 대표팀의 눈부신 활약 때문이 아닐까. 요즘 나도 관중 역할에서 벗어나 '직접 저 운동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마음속에서 꿈틀꿈틀 할 때가 꽤 많다. 성인이 되고 헬스 PT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종종 하긴 했지만 여러 명이 단체로 하는 스포츠는 중, 고등학교 체육 시간 이후로 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게 작은 비밀이 하나 있는데, 사실 나는 운동을 좋아하고 굉장히 빨리 배운다. 얼핏 봐서는 비실비실한 체력에 유연성이라고는 1도 없는 뻣뻣한 신체를 가져 '딱 봐도 운동이랑 거리가 멀게 생겼네' 싶은 인상을 주지만 흥칫뿡. 멋도 모르는 소리다. 비록 유연성이 좀 딸리지만 순발력이 굉장히 좋고, 무엇보다 승부욕과 집중력이 매우 강하다. 초등학교 때는 체육대회마다 달리기 계주는 도맡아 했고 멀리뛰기도 제법 잘했다. 나의 잠재력(?)을 알아본 육상 코치님이 임의로 학교 육상부에 집어넣어 훈련을 시키다가 깜짝 놀란 부모님이 한달음에 달려오시기도 하셨다. 당시만 해도 집중적으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회 통념상 학업과는 척을 진다는 의미였다. 항상 반에서 성적으로 최상위권이었던 내게 육상선수의 길은 당치 않았고 '우리 아이는 공부시킬 것이라며' 교내에 서슬 퍼렇고 무섭기로 소문난 육상 코치님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엄마를 몰래 숨어서 지켜봤다.
그렇게 엄마의 깜짝 방문으로 육상과 작별했다. 중학교 때 역시 공부 좀 하는 '여자아이'여서 체육 수행평가나 체력장 같은 것에 취약할 것 같았지만 천만의 말씀. 유연성 측정 분야만 최하위 등급이고 나머지는 전부 1등급이었으며, 3년 내내 체육 수행평가도 대부분 만점이었다. 매일 점심만 먹으면 공 하나만 가지고도 온 운동장을 내지르던 남자아이들과 달리 고작 내신 평가를 위해 잠깐잠깐 하는 운동들이었지만 그래도 참 즐거웠다. 가끔씩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을 보며, 재밌어 보이긴 했지만 언감생심 그 사이에 끼여 같이 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남녀공학에서 운동장은 남자 학우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런 분위기에 딱히 그 어떤 불만이나 문제의식도 없었다. 그냥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체육 대회를 준비하며 소프트볼에 꽂혀 반 친구들과 야자 시간을 째며 열심히 연습했다. 여고라는 특성상 사춘기 호기심 어린 이성의 눈에서 해방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모두들 몸 쓰는 운동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비록 4강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탈락했지만, 경기가 끝났을 때 함께한 친구들과 얼싸안고 눈물 콧물 쏟으며 울고 웃었다.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이 내 인생 처음으로 '스포츠를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라고 명확하게 영혼에 각인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함께 연습하며 깔깔 웃고 간식을 나눠먹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쳤다. 그런 우리를 보고 '야자 시간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데 기운 뺀다'로 나무라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경기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느꼈던 내 안의 뜨거운 감정들은 그런 얕은 염려들에 댈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거기까지.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인이 되자 운동은 또 내 인생에서 급격히 멀어졌다. 그러나 큰 수술 후, 회복과 빠른 일상 복귀를 위해 내게 운동이 더 이상 '옵션'이 아닌 '디폴트'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다시금 운동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운동은 그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등록했던 필라테스나 PT 같은 정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 옵션을 고려하다 결국 나는 예전부터 꼭 배워보고 싶었던 테니스를 배우기로 했고 전광석화처럼 조사해 동네 실내 테니스장에 등록했다. 아직 반년도 배우지 못한 테린이지만 테니스를 치는 순간순간이 매우 즐겁고 활력이 넘친다.
등록 초반에 역시 비실비실한 내 겉모습을 보고 '잘 못할 것 같은데' 어림짐작 하셨던 코치님이 요즘 무슨 태릉인 훈련시키듯 공을 던져 주신다. 그래도 아직 경기를 뛰기엔 부족한 부분 투성이지만 근성 있고 누구보다 집중해서 코치님의 시범 동작을 카피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 매일 정직하게 연습하는 내 모습이 나름 신선하게 느껴지셨나 보다. 가끔 주변에 테니스를 친다고 하면 "그럼 테니스복 사느라 돈 많이 드시겠네요."'라고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아마 내 테니스 연습 복장을 보면 빵 터질지 모르겠다. 아직 아웃핏까지 신경 쓸 정신도 없거니와 그저 테니스를 치는 행위 자체가 즐거워 남들이 내 복장이 넝마 같다고 생각해도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
언젠가 정말 필드에 나가 정식 경기를 하게 된다면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볼 머신의 쉴 새 없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도 벅찬 테린이는 일단 옷장 한 구석에 잠자고 있던 회사 츄리닝을 입고 다닌다. 복장이 뭐가 중요한가, 내가 그 운동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으면 그만이지. 그동안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잘 못하고 용쓰는 모습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들이 운동과 멀어지게 했지만 각종 반대를 극복하고 결실을 맺은 연인처럼 우리는 끝내 재회했다.
운동 잘하는 멋진 언니.
요즘 내 삶의 추가된 새로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