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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은 Oct 03. 2023

소시민 평범녀의 하루

 저녁 8시,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7시 집에 귀가했다. 제대로 쓴 글이 없어 부끄러웠지만, 일단 참석은 해야지 생각하며 실내복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엉덩이를 치마에서 빼다 퍽 소리가 났다. 지퍼 한쪽이 빠진 거다.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

 이 치마로 말할 것 같으면 며칠 전, 고향에 내려갔을 때 고급 여성복 브랜드 A 매장에서 산 치마였다. 평소라면 자라(ZARA)에서 샀을 거를 추석 용돈을 받았기에 큰맘 먹고 샀다. 엉덩이가 커서 청바지는 커녕 예쁜 하의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내게, 놀랍도록 콤플렉스를 가려주는 이 치마에 반해 나머지 못도 모두 여기 맞춰 샀다. 그러고 집에 갔는데 다음 날, 이놈의 자크가 부실한 느낌이 드는 거다. 끝까지 내리면 위로 잘 안 올라갔다.

 가서 바꿔달라 할까? 하지만 완전 고장 난 것도 아닌데... 애매했다. 교환해 봤자 다른 제품도 비슷하면? 무엇보다 해운대까지 멀어서 ‘에이~ 괜찮겠지.’ 하고 서울로 올라온 거였다. 다만 혹시 모르지 싶어 그것만 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 이 사달이 난 거다.


 처음엔 침착하게 유튜브에서 <지퍼 고치는 법>을 검색했다. 몇 개가 있었는데 지퍼를 잘라 바느질하는 등 물리적 조치가 들어갔다. 그러다 고장 나면 교환도 안 해줄라. 해운대 신세계 백화점 A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안 받았다. 추석 첫날이었다. 동네 수선집도 전화하니 휴무였다. 어떡하지. 연휴가 끝나기 전에 나는 두 번째 책을 쓰러 미국에 가는데. 미국 가기 위한 유일한 옷으로 이걸 샀는데. 시카고에서 자크를 수선할 생각 하니 일처리도 늦고 비싸게 받을 것 같아 혈압이 올랐다. 어떻게든 한국에서 해결해야 했지만 긴 연휴의 첫날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시각은 7시 40분, 제일 가까운 신세계 백화점을 찾아보니 8시 반까지 했다. 거기 전화를 걸었다.

 착한 중년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이런 일이 있는데 혹시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분은 사정은 딱하지만 정말 죄송하게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산 매장에서 바꾸는 게 원칙이라고. 아니, 그럼 부산까지 가라는 건가? 혈압이 올랐지만 그분이 너무 착하게 죄송하다고 해서 일단 알겠다고 끊으려다 물었다. ‘그런데 혹시 거기 품번 ~ 치마 66 사이즈 재고가 있나요?’ 있다고 했다. 네이버에 검색했다. ‘백화점, 다른 매장, 교환’

 된다는 답변이 많았다. 순간 나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모임 사람들에겐 죄송하지만 일이 있어 못 간다고 했다. 차마 이 옷 하나 때문에 그러는 사실이 쪽팔려서 물건 A/S라고 말했다.

 미친 듯 신세계 명동 매장으로 달려가 내 사정을 말하며 애원했다. 점원은 “아... 매니저님은 전 부치러 일찍 퇴근하셨고.... 부산 매장도 전화를 안 받는네요. 거기 매장이랑 합의가 안 된 상태로 제가 임의로 해드릴 순 없어서요...” 아... 네... 알겠는데 제발 좀... 안 될까요. 처음에는 애원하다가 안 된다고 하자 ‘당신들이 불량을 팔아놓고 안 바꿔줘?’ 라고 차마 말을 못 했지만 이런 뉘앙스를 문장에 담아 슬슬 상대 탓을 하며 애걸했다. 하지만 결국 안 된다고, 부산 매장이랑 연락이 된 후에 된다고 했다. “근데 거기서도 당연히 해주지 않을까요? 거기서 안 해줄 그게 있어요?”

 순간 자라같은 브랜드가 너무 그리웠다. 글로벌 스파 브랜드는 텍이 있고, 문제가 있거나 하면 굉장히 쉽게 바꿔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며칠 입다가 입기 싫으면 다시 택 붙여 바꾸는 파렴치한 짓을 한다고도 했다.) 자라에서 5만 원이면 살 치마를 20만 원 넘게 팔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자크를 만들어놓고 (물론 고장의 원인은 내 엉덩이가 커서인 것도 있고 하루 입긴 했으나) 안 바꿔준다고!! 온갖 욕이 속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안 된다니까... 이틀 뒤 부산 매장과 얘기가 된 다음에 오라고 하니까... (하지만 나는 이틀 뒤 출국한다...) 눈물을 흘리며 (안 흘림) 더 따지지도 못하고 집에 왔다. 사실 이 정도로 난리 칠 일은 아닌데 지금 처한 상황 때문에 더 혈압이 올랐던 것 같다. 부산에서 교환할까 말까 고민한 일만 없었더라도 이 정도로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나에 대한 분노가 애꿎은 명동점 말단 중년 직원에게 전가됐다. 생각해 보면 그분도 연휴 시작이다 룰루~ 하며 퇴근만 기다렸을텐데 마치기 10분 전 갑자기 이상한 냔이 나타나 난리 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만약 부산 매장에서 허락해 주면 갈 때 과일이라도 사가야지... 아니 근데 스밤 잠시만, 내가 왜 그래야 되냐? 애초에 옷을 제대로 만들어야지... 급기야 대표가 누군지 인터넷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소시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만 참고 기다려보면 될 것을... 집으로 오는 길에 치킨 하나 사들고 왔다. 이 치킨은 오늘 누가 추석 선물로 준 거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를 챙겨주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이 치마... 솔직히 별 일 아니잖아. 살면서 이보다 괴로울 고민이 얼마나 많을 건데, 이런 거에 이렇게... 울고 싶어지면 안 되지... 이게 다 내가 돈이 없어서다. 돈 좀 벌어 이 새끼야...


 이런 생각을 하며 집에 왔는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은아. 내 첫 줌모임 끝났는데 너무 행복하다. 이 모임을 가르쳐줘서 고맙다.” 나는 못 간 글쓰기 모임이 참 좋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쉽지만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생각도 하긴 했다. 내가 참석을 안 하면 친구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은 더 자유롭고 새로운 면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오랜 친구 앞에서 아닌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친구의 모습이 기대되었다.

 마음을 좀 가다듬고 집에서 혼자 치킨을 먹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이것 좀 보라고. 나는 솔로 16기 상철과 영숙이 어깨동무를 하고 압구정에서 만난 사진이 리나리나(영숙 인스타그램 아이디)의 피드에 올라왔다고. 둘은 지금 최종 커플이 되냐 마냐 논란에 있는, 레드벨벳의 ‘사이코’ 노래 가사 같은 지독히도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하나 며칠 전 상철이 영숙 말고 다른 여자 ‘영자’랑 서울에서 만났고, 영숙이 영자를 언팔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관계가 미궁으로 빠졌다. 그리고 어제 방송에선 영숙이 상철을 너무 좋아해 울었거든… 방송이 너무 인기가 많아 다음 주에나 결과가 나오는데 오늘 갑자기 영숙과 상철이 만나 어깨동무에 하트 이티콘 하는 사진이 올라온 거다. (그게 진짜 현재 커플인 것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걸 보는데 와… 기분이 째졌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좋냐… 근데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솔로 갤러리에 가 보니 “일주일 동안 여미새 행동하는 상철이 패고 싶고, 솔직하게 말 안 하는 영숙이 짜증 나서 내 성격이 왜 이렇게 더럽지 싶었는데 오늘 둘이 사진 올라오니 갑자기 기분 ㅈㄴ 좋네. 나 상철 영숙 사랑하나 봐.” 댓글도 이렇게 달렸다. “나도임. 혹시 이거 추석 선물인가?” 아까 명동 신세계 뛰어가는데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나는 솔로 얘기하고 있어다. 나는 솔로 16기는 현재 태극 전사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전 국민을 들었다 놨다 한다.

 어제는 나솔 16기를 친구랑 같이 봤는데 상철 나오는 대목에서 완전 홍상수 영화 같다고, 그동안 홍상수 영화 너무 올려치기 당한 거라고, 사실 홍상수는 <궁금한 건 당신>처럼 녹음기 켜 놓고 자신의 하루를 녹음해서 영화로 만든 거라고. 우스개 소리지만 진짜일지도. 그러니 나도… 파이팅 해야지!

 이틀 뒤, 추석 휴무를 마친 부산 매장에서 연락이 왔다. 죄송하다고, 당연히 바꿔드리겠다고. 하… 감사합니다. 근데 명동 매장 점원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차마 고개를 못 들고 갔는데 그분은 너무나 친절하게도 괜찮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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