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성은 Oct 10. 2023

내 운명을 고르자면

나의 장점 100가지

“지금 내가 가장 두려운 것. 옆자리 커플이 우리를 사이비 모임이라 생각하는 것.”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부산의 한 카페, 커플은 2시간째 싸우고 있었고, 옆엔 30대 여자 세 명이서 자신의 장점 100가지를 쓰는 중이었다.


“주말에 데이트하는 거 좋지. 하지만 이게 휴식은 아니거든.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남자의 고백에 여자는 침묵했고, 그 틈새로 우리는 각자의 장점을 낭독했다.


“나는 귀엽다.”
“나는 엉덩이에 살이 많다.”
“나는 배민 리뷰 약속을 잘 지킨다.”


생각보다 100개는 금세 써졌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것도 장점이었고, 아무나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장점이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것도 덕목이었고, 거짓말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왠지 저 커플도 이걸 하다 보면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얼떨결에 그들은 우리의 장점 300가지를 알게 되었고, 우리는 연애의 민낯을 목격했다.


“근데 이거 왜 하자고 한 건데”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해보라 드라. 이걸 쓰다 보면 단점도 장점으로 보이고, 장점도 단점임을 받아들여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데. 그럼 소원이 이루어진다 카더라.”
“니 또 시크릿 책 읽었나?”
“시크릿이 아니라 심.리.학!”

나는 사주와 타로는 안 믿지만 이런 책들은 좋아했다. 운명을 주무르는 세계관은 나에게 힘을 주니까. 담력이 필요한 순간에 아이유의 <분홍신>을 듣는 이유도 같다. '내 운명을 고르자면,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르지.'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괜찮은 기분이 든다. 멋진 게 펼쳐질 것 같거든.


우리는 시간이 남아 다음 것도 해 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두렵다고 느끼는 10가지 써보기.’


나는 ‘고인 물, 촌스러운 창작자가 되는 것’을 1번에 적었다. 그 외엔 잘 떠오르질 않았다. 내가 그렇게 용감했나. 아닌데. 막상 쓰려니 왠지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이게 진짜 내가 두려운 게 맞나? 세상이 하도 겁줘서 그런 게 아닐까? 뭐든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해,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을 거라 믿는다.


사진관에서 일하는 친구는 ‘내 사진 실력이 여기서 멈출까 봐 두렵다.’를 1번으로 적었고, 결혼한 친구는 ‘출산으로 내 자리가 대체되는 게 두렵다.’고 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일을 하지 않거나 돈을 못 벌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이런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 같은데 생각을 바꿔볼까.”
“어떻게 바꾸노. 그게 팩튼데.”
“일 안 하고 돈 안 버는 사람 누구 있지."

"우리 할머니."

"할머니 쓸모없나?"

“아니. 내가 완전 사랑하는데.”
“맞네.”
“우리도 중학교 때부터 친구잖아. 그때 우리 일도 안 하고 돈도 안 벌었다 아이가. 지금까지 우리가 친한 것도 만나면 즐겁고 잘 통해서지 일을 해서는 아니잖아. 좋은 사람의 기준엔 일하는 거 외에도 많은 게 있지 않을까?”


맞네~를 외치던 우리는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진체 헤어졌다. 오랜만에 느낀 해방감이었다. 집에 가서 이 얘기를 하자 엄마는 코웃음 쳤다.


“니가 그래 봤자 세상은 니 일 안 하고 돈 없으면 루저라 생각한다.”


팩력배 다운 말이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느낀 자유로움은 다른 데 있다.


“엄마. 근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냐도 중요한데, 내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냐도 중요하더라. 내 행복엔 그게 더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른다. 능력있고 돈 잘 벌어야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살았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도 그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했었는데 안 그래도 된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그러니까 엄마도 너무 그러지 마라."


“난 니가 결혼을 안 해서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넘 쪽팔린다.”


“아이고 참말로."


아이유, [Modern Times], 201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