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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은 Sep 25. 2023

초딩들의 작업일지

촬영 마지막 날 새벽에 쓴 일기

 이번 주 내내 촬영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구 두 명이 운영하는 프로덕션의 일인데, 한 명이 신혼여행 가서 대신 투입됐다. 신혼여행이라고...? 결혼 소식도 몰랐다가 현장에서 뒤늦게 어제가 그 친구 결혼식이란 걸 알게 되니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축의금 아껴서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드는 난 썩었다. 건너 들은 얘기로는 스몰웨딩이라 하객수가 제한적이어서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100명은 더 될 거라 했다. 다시는 스몰웨딩 안 할 거라고... 갑자기 미안해져 행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촬영은 아침 10시부터 6시까지 일당 25만 원, 5일 나오고 교통비까지 총 130만 원을 받기로 했다. 처음 제안받았을 땐 '우왕~ 감사합니다~' 했는데, 마감이 몰려 갑자기 바쁘게 되었다. 그런데 일 시작하기 하루 전날, ‘9시부터 7시까지 와야 할 것 같아~ ’하길래 조금 예민해져,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럼 25만 원은 너무 짜다고...!’ 용기 낸 말이었다...  


 비디오편의점(개인사업자)을 시작하고 ‘주는 대로 받을게요. 시켜만 줍셔’ 마인드로 일하다 보니 여전히 돈 얘기가 어렵다. 하지만 상대측에서 바로 ‘아하! 그럼 원래 시간대로 와!’ 하길래 ‘어라...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거였네...’라고 쫄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현장에 와서야 이게 상대적으로 쉬운 촬영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한 공간에서 10명 이내 아이들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촬영인데, 나중에 관찰 카메라처럼 그들을 분석할 예정이란다. 꿀이네... 하지만 나보다 1주일 먼저 촬영 시작한 친구는 매우 지쳐있었는데, 평소 엄살을 피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다소 의아했다.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거야...’ 하지만 아침 10시 출근해 12시 점심 먹고 2시가 넘어가자 그때서부터 슬슬 그 고통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너무나....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 행사는 일종의 창의력 증진 프로그램이었다. 주입식 교육에 찌든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지시 내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자, 여기 재료가 사방에 널려 있으니 아무거나 만들어 보세요.’ 90년대 시절에 학교에서 나눠준 과학상자 같은 게 코딩키트로 업그레이드되었고, 가위, 풀, 자부터 톱, 망치까지 공구들이 다양했다. 재료는 주로 재활용품이었는데 깨끗한 쓰레기 같았다. 여기에 ‘수평어 쓰기’ 환경이 추가되면서 서로 닉네임을 부르며 말을 놓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선생님 이것 좀 도와주세요’가 아닌 ‘또치(30대 나의 닉네임)야, 나 좀 도와줘’


 이런 신박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지루했던 건 드라마틱한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 같은 경쟁도, 미션도 없이 혼자 조용히 와서 무언가를 만들다 집에 갔다. 그런 그들을 찍고 있노라면 방망이 깎는 노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1주일째 같은 그림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친구가 정력을 잃어가는 건 당연했다. 사람이 지치는 건 체력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루하기 때문이라는, 내가 요즘 밀고 있는 가설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의 귀여움이었다. 특히 통통한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내가 초등학생일 땐 마름을 선호했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되었다고 이렇게 통통한 아이들이 귀여울 일이냐고... 손으로 볼을 찔러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힘들었고, 친해지면 시도해 보기도 했다. 그거 말고는 낙이 없던 촬영 아르바이트가 조금씩 재밌어진 건 아이들의 작업일지를 훔쳐보고 나서였다.


 ‘오늘은 석고 가루를 틀에 넣어 욜리르 망치를 만들었다. 작지만 엄청 힘들었다. 집에 가면 잘 간직할 것이다.'  


 아이들이 만든 건 죄다 잡다구리 한 것들이었다. 스티로폼으로 모양만 그럴듯한 칼, 아이스크림 막대기로 만든 햄스터집, 절대 안 쓸 것 같은 부직포 파우치 (VIST라 적혀 있어서 이게 뭐냐 물으니 그제야 VISIT의 I를 빼먹었다고 울려했다), 글루건 덕지덕지한 세븐틴(아이돌 그룹 이름) 응원봉 등이 있었다. 그 쓸모없어 보이는 1 DAY 1 똥들을 보며 ‘어차피 결국 다 버릴 거 아녀? 재활용품으로 쓰레기를 만드네~’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신줏단지 모시듯 품에 안고 귀가했다.  


 어떤 아이의 일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칼을 만들었다. 다음번에는 야구매트도 만들 것이다.’

 ‘야구매트를 만들었다. 다음번에는 캐치볼을 만들 것이다.’


 만든 그 날 봤더라면 감흥이 없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의 기록들을 보니 조금 이상했다. 아이가 적은 대로 다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엔 ‘다음번엔 머를 만들지 고민이다.’ 라 적혀있어 봉준호 같았다.


 또 다른 아이 일지는 첫 문장부터 노트를 떨어트릴 뻔했는데...


 ‘용사가 되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대검 엑스 칼리버와 드래곤볼로 그을린 방패 팬타코스트, 그리고 현대적 무법자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옷 그라디온. 이 3가지로 나는 이제 완벽하게 무장되었다. 내일과 내일 모레는 내가 착용할 기사의 투구를 만드리라.’


 말이 잘 통해서 꽤나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자신을 용사라고 믿었다니... 이 친구를 더 알아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일이면 여행을 가기 때문에 오늘까지만 이곳에 올 수 있을 것 같다. 반은 가족여행 가기 싫은 마음이 아우성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족 여행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이 프로젝트는 이번 한번뿐이니까. 오늘은 마법의 조명을 만들었다. 정말 작고 예쁜 것 같다. 이제 플라스틱을 칠하는 일만 남았다.’


 나는 돈을 받으면서도 너무 지루한 시간이었는데, 누군가에겐 눈 뜨면 가고 싶은 곳이었구나. 몰랐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열린마음으로 임해야지 싶지만 내일이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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