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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은 Sep 19. 2023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잠> 유재선 감독과의 대화

재선이를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대학교 영화 동아리 ‘몽상가들’에서다. 같은 꿈을 꾸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 들어간 그곳에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며 놀았다. ‘언젠가 우리 동아리에서도 칸영화제에 가는 사람이 나오겠지?’ 상상하며.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그 일은 일어났다. 정유미·이선균 주연의 영화 <잠>으로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돼 세계적인 러브콜을 받는 유재선 감독을 2023년 9월 3일 화상으로 만났다.

성은

기분이 어떤가요?


재선

일단 친구와 <잠>에 대해 인터뷰하는 건 처음이라 무척 어색한데요. 반말로 하고 싶지만 프로페셔널리즘을 위해 존댓말로 하겠습니다.


성은

네, 그럼 반말로 진행하겠습니다.(웃음) 첫 번째 질문,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어?


재선

그 질문은 처음 받아보는데. 글쎄, 돌이켜보면 과정이 재미있어서였던 것 같아. 시나리오를 쓰고, 친구들 가족들 삼삼오오 모여 촬영하고 편집하고 완성본을 함께 보며 웃었던 과정 자체가 다 너무 애정 어린 경험이었기 때문에. <잠>도 비슷했던 것 같아. 단편영화 찍을 때와는 다르게 베테랑 스태프, 배우분들과 함께했지만 그 재미는 가시지 않았고, 어느 부분에선 더 증폭됐던 것 같아. 왜 영화감독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왜 그만둘 수 없는지는 답할 수 있는 게, 이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해보고 싶어.


성은

부담감과 괴로움보다 재미가 더 컸구나. 몽유병이란 소재는 어떻게 떠올린 거야?


재선

영화 <옥자>에서 같이 연출부 했던 형이랑 시나리오 스터디를 했어. 형의 지론은 ‘영화는 아이템이다. 아이템이 좋아야 사람들이 보러 온다’여서, 매일 한 가지 아이템을 기승전결 이야기로 만들고, 월·화·수·목·금 5개를 완성해 토요일에 만나 저녁을 먹으며 이 아이템이 왜 형편없고 저 아이템은 왜 괜찮은지에 대해 꽤 오래 스터디했어. 당시 나는 스터디 모임의 철학이 그리 와닿지는 않았어. 소재보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지가 영화의 재미라고 생각했거든. 그럼에도 거기서 나왔던, 쿼터를 채우려 급급하게 낸 아이디어 중 하나가 몽유병이었고, 사실 난 다른 걸 하고 싶었는데 형이 그거 재밌다고 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발전시킨 게 <잠>이라는 이야기야.


성은

고마운 분이네.


재선

정말 감사하지. 형도 스터디에서 나온 아이템을 발전시켜 그래픽노블 책을 내서 큰 호평을 받았어. <재생력>(조성환 지음, 미메시스 펴냄)이라고, 박정민 배우도 좋게 보셔서 두 분이 대담한 게 유튜브 <밀리의 서재> 채널에도 있거든. 정말 추천해. 실제로 형은 <옥자>의 스토리보드를 그리기도 했고, 명감독들이 찾는 스토리보드 작가이십니다.


성은

저도 그 책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 말이야. 네 제1목표가 재미있는 장르영화를 만드는 거라고 했잖아. 왜 그런 욕망이 생겼는지 궁금해. 혹시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비밀의 언덕> 봤어? 나는 장르영화보단 그런…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에 더 마음이 가다 보니 궁금했어.

<비밀의 언덕 The Hill of Secrets> (2022) 이지은 감독

재선

그런 잘 만든 독립영화들을 보면 메시지도 뚜렷하고 인문학적 깊이도 훌륭하잖아.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있고, 사회시스템을 바꿔보려는 의지도 있고. 그런데 나는 그런 욕망이 적은 것 같아.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관객에게 이 작품을 보는 시간 내내 정말 즐거웠다는 기분만 들게 한다면 나는 늘 충분히 만족했던 것 같아.


성은

그렇구나. 그런데 그 순간에만 재밌는 거로도 만족해?


재선

그게 편협하거나 어떤 얕은 목적이라고 생각 안 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하나의 예술이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거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언젠가 마스터하고 싶은 능력이기도 하고.


성은

그 재미는 어떻게 만들 수 있어? 인공파도처럼 재미와 무서움을 기획하는 거잖아.


재선

어려운 질문인데. 사실 정답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다만 시나리오를 어떻게 썼는지 복기해 보면… 몇 가지 룰을 따랐던 것 같아. 시나리오에 나오는 모든 대화나 행동은 이야기를 앞으로 진전시켜야 한다. 특히 아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데 많이 도움을 줬어. 황당한 상황 속에 우리를 던져놓고 너였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의논을 많이 했어. 거기서 인공적이지만 진실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려 했고, 그렇게 나온 유효한 안 중에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을 선택해 생겨난 시나리오가 아닐까 싶어.


성은

정말 재밌어.


재선

내가 영화과를 나오지 않아서 스토리의 룰이라든지 체계, 이런 것을 모른 채 본능대로 쓰려고 했던 것 같아. 내가 재미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재미있겠지 하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간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성은

영화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언제야?


재선

‘데일리’를 받을 때였던 것 같아. 촬영을 마치면 현장 편집 기사님이 그날 촬영본을 편집해서 보여주는 걸 ‘데일리’라고 하거든. 그 순간만큼 후회스럽고 우울할 때가 없더라고. 왜 이렇게 찍었을까. 그렇게 열심히 찍은 게 이건가? 괜히 더 비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고. 결과물을 보며 생각했지. 나는 감독 자질이 없구나. 그러다 어느 휴차(쉬는 촬영 회차)에 문득 봉준호 감독님의 데뷔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했어. 바쁘신 거 알지만 문자를 보냈어. ‘감독님, 원래 데일리 편집본을 보면 낙담하고 후회스러운 슬픈 감정이 드는 게 정상인가요?’ 그러자 굉장히 정상이라고, 외려 잘하고 있다는 시그널이니 너무 걱정 말라고, 지금처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위로해 주셨어. 정말 큰 힘을 받아서 나머지 촬영을 연연하지 않고 잘 해낸 기억이 나.


성은

눈물 나요. 근데 데일리 별로라고 했는데 봉준호 감독님은 그게 잘 가는 거래?


재선

그렇다기보단,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더라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에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재주보다 더 잘하고 싶잖아. 제한된 여건 속에서 아등바등하는 게 촬영인데 얼마나 더 잘하고 싶고, 최선을 다해도 아쉬운 부분이 많겠어. 근데 신기하게도 계속 보고 편집하다 보니 괜찮네, 열심히 했네 생각하는 시점이 있었어. 그러면서 자랑스러워지고, 이 결과물이. 그런 감정의 변화를 느꼈던 것 같아.


성은

잘했어. 정말 고생했어. 그럼 마지막으로 유재선에게 영화란?


재선

사실 영화적 내공이 많지도 않지만 민망할 정도로 제 인생은 거의 영화밖에 없다 싶을 정도로 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영화 보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고, 직업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 거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영화를 많이 보고 영화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인생의 절반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은

네, 그럼 계속해주세요.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예전에 재선이와 대화하며 썼던 동아일보 칼럼을 꺼내보았다. 오래오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친구들을 응원하고, 그들 옆에서 멋진 풍경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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