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루노트
*본 글은 항문 관련한 아픔을 처음 겪어본 자의 글이니 불편하신 분은 나가기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 브런치에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거장이 되고 싶은데 생활비를 어떡하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했다. 나에게 닥친 가장 절실한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돌파를 못 했다.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와서일까. 다음 책 계약금을 받아서일까. 지금 나는 후암동 집을 친구에게 빌려준 뒤 시카고에 와있다. 여전히 돈은 걱정되지만... 일단 다음 책 '치부노트' 쓰기에 전념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치부까지 책에 쓰진 않을 거다. 그냥 지금 나에게 가장 큰 이슈여서 써 본다...
미국에 온 지 한 달째. 며칠 전엔 남자친구 생일이었다. 트립 어드바이저에 미슐랭 빕 구르망(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을 체크한 뒤 리스트를 뽑아 보냈다. '생일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 중에 어디 가고 싶어?' 그러자 그는 '생일엔 훠궈집에 가야 하는데?' 했다. 그 훠거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1인당 29달러를 내면 무한리필이 되는 곳으로 (아래 종이에 마음껏 체크 가능하며 3회전까지 가능하다. 대신 남기면 벌금이다.) 한 번 가 보고 충격받은 곳이다. '아니... 이렇게나 시키는데 29달러 낸다고? (미국 물가 대비 저렴) 식당이 이윤 남기려면 식자재가 너무 저렴한 거 아닐까...'
내가 살 테니 더 좋은 데 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꼭 가야만 한다고 했다. "생일인 사람은 무료래!" 학교에서도 무료 음식을 찾아다니는 대학원생의 삶은 밖에서도 계속되었고, 그래도 생일인데... 마음이 아파 반대 의사를 내비치자, 그럼 자기 혼자 가서 점심에 먹어도 되냔다. SNS에서 생일 당사자는 무료! 이벤트를 보고 혼자 와서 공짜로 먹고 가는 거대한 동양인 남자... 동반 1인도 없이 혼자 먹는 모습을 보면 사장님이 얼마나 싫을까... 결국 생일파티는 핫팟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당일 날, 훠궈집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멋지게 꾸민 여성이 들어오자 기다리던 남성이 하트 풍선을 들고 "Happy Birthday Emile"라고 외쳤다. 남자친구가 그들에게 말 걸었다. "생일이에요? 나도 생일이에요!" "어머~ 생일 축하해요~ 생일엔 역시 훠궈집이죠." 저런 인싸도 생일날에 무한 리필집에 오구나... "거봐, 오는 사람들 많지?" "응..." 그렇게 나와 윌리엄, 윌리엄의 베스트 프렌드 조이까지 셋이 모여 흡입을 시작했다. 1회전이 끝났다. 더는 못 먹겠다고 배를 두드리는 내게 조이는 말했다. "이제 시작이에요." 20대 남자들이란 고기를 왜 이렇게 많이 먹는지... 누나는 오마카세 그런 거에 익숙해서 (아님) 이렇게 많이 먹는 거 안 좋아한다고...
"조이야. 30대는 건강을 생각해서 많이 안 먹어."
"나도 알아요.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못해서 많이 못 먹게 되니까."
"아... 응..."
그래도 생각보단 맛있었다. (그 인싸가 생일파티를 여기서 하는 거 보고 식당에 대한 이미지가 약간 바뀌어 더 괜찮게 느껴진 듯...) 좋은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무른 변이 시작된 것이다... 배가 터질 때까지 훠궈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매일 억지로 먹는 개 맛없는 아이스 라테? (미국의 우유는 한국처럼 고소함이 없어 아이스라테가 아메리카노에 우유 부은 맛이라 돌아버리겠다) 그것도 아니면 밥솥이 없어서 햇반을 자주 먹은 죄...? 화장실을 갔다 나오면 똥꼬가 싸했다. 화학반응을 하는 듯한 느낌... 하지만 몇 분 뒤면 사라졌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휴지로 깨끗하게 닦기에 주력했다.
너무 닦아서일까. 다음날부터 진지하게 똥꼬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세린을 듬뿍 발랐다. 혹시 몰라 주요 부위에 마데카솔도 발랐다. 그러고 자고 일어났는데… 끈적한 액체가 엉덩이 사이에 있으니 더 찝찝하고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는 거다… 마치 마약 한 사람처럼 참지 못하겠는 느낌. 대체 내 똥꼬에서 무슨 일이… 손을 뻗어 엉덩이 셀카를 찍어 보았다. 혹시 몰라 동영상도 찍었다. 봐도 모르겠는데… 혹여 잘못 눌렀다 SNS에 연동될까 봐 바로 지운 뒤 휴지통에 들어가서 계속 확인했다. 바세린 듬뿍 바르기는 안 좋은 생각 같아서 샤워를 하고 선풍기로 뽀송하게 말리니 한결 나았다. 문득 찌라시에서 본 사건들이 생각났다. <인기 연예인 A모씨 새벽에 응급실에 항문 파열로 실려오다...!>그런 기사들을 볼 때면 '어머어머…' 수군거리기만 했는데… 그도 얼마나 아팠을까. 지금 이렇게 사소하게 그곳이 아픈 것만 해도 죽겠는데…
다음 날, 못 참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똥꼬가 아파... 이상한 거 한 건 아닌데... 아파... 한 친구가 조심스레 자기도 치질 걸려본 적 있다고 이것저것 추천해 줬다. 그런 병은 나와는 먼 얘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내 똥꼬가 얼마나 아픈지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친구와 통화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ㅇㅇ이도 똥꼬 아픈 적 있었냐 물어봐."
남자친구는 멈칫하더니 통역했다.
"어, 당연히 있지. 너네 애널 했니? 겉이 아파 안이 아파?"
"아니 그런 거 안 했는데 그냥 아파서… 물어봐…"
어떡하지. 병원 가도 바로는 보험이 안 될 텐데… 작년에 미국에 있을 때 손톱이 문에 끼어 보라색으로 변해 병원 갔더니 살짝 혈 뚫어주고 200만 원 나왔다. 한국 오자마자 여행자보험으로 받았긴 했지만… 지금은 수중에 돈도 없다고요. 수술하라고 하면 어쩌지…? 몇천만 원은 10만 원짜리 보험으로 안 해줄 것 같은데… 치질로 고국에 돌아가야 하나…
항문 통증이라는 게, 가끔은 참을 수 없이 강렬해서 '제발 그냥 나를 마취총으로 쏘아 기절시켜 줬으면…' 싶다가도 갑자기 또 참을만해졌다. 남자친구는 걱정하다가 또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니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 내가 ‘괜찮은 거 같긴 한데 혹시 내 똥꼬 좀 봐줄 수 있어?’ 하고 엉덩이를 들이밀자 ‘네가 괜찮다면 더 이상은 난 안 보고 싶어…’ 했다. 이 눔 새끼…
고통을 잊기 위해 달리기 했다. 통증을 더 큰 통증으로 이기기 위해. 가만히 있을 땐 신경이 온통 똥꼬로 쏠리다 힘든 유산소를 하니 말끔히 잊어졌다. 바나나랑 케일이랑 당근도 억지로 먹었다. 여기까지 쓴 글을 '매일 아침 글쓰기 모임'에 올리자 애기 엄마인 친구들이 댓글을 달았다.
"성은님, 자극적인 음식 피하시고 따뜻한 물에 매일 좌욕을 해주세요. 출산 후 미약한 항문질환으로 괴로웠는데 … 좌욕만 한 게 없습니다 도넛 방석이 온열이 되는 방석도 있거든요. 가격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추천합니다!!"
"샤워기 뜨거운 물 틀어서 똥꼬에 집중공격해 봐. 애 낳는다고 회음부부터 끝까지 잘라봐서 그 고통을 내가 아오.. 인생 최대 고통이었다. 그리고 휀티벗고 똥꼬 끝까지 말리기.."
출산을 경험한 엄마들에게 항문 통증은 당연히 거쳐간 무엇처럼 느껴져 새삼 숙연해졌다... 이보다 몇십 배 더한 고통을 다 겪으며 산다고... 그런데 좌욕이 뭐지? 안 그래도 치질 겪은 친구가 '변기 위에 놓고 쓸 수 있는 엉덩이 대야'같은 걸 사야 한다며 아마존 링크를 보냈다. 하지만 한국처럼 당일배송도 안 되는 이 느린 나라에서 5일이나 걸리길래 흘려 들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좋다고...? 일단 지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 주변을 둘러보니 마땅한 대야가 없었다. 스프링 믹스 먹고 남은 큰 플라스틱 통은 있었다.
뜨거운 물을 부었다. 엉덩이를 넣었다. 그리고 뭐.. 어떡하라고... 그냥 있으면 되는 건가... 엉덩이에 힘을 줘볼까? 그렇게 괄약근을 풀었다 조였다 시작했는데 "아아아악!!!!!" 신음소리가 절로 났다. 너무 아파... 그런데... 기분이 좀 좋아... 혹시 이거... 그거...? 그 순간 배에서 신호가 왔다. 변기에 앉아서 아무리 힘줘도 나오지 않았던 변이... '나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 됐어요~'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비데의 기능은 똥꼬에 물을 쏘아 변을 보게 하는 단순히 물리적 도움을 주는 기계라 생각했는데 생물학적 기능도 있었던 걸까? 에이, 아니겠지. 그냥, 초심자의 행운이겠지. 그런데 몇 시간 뒤, 두 번째로 시도해도 같은 신음이 올라왔다. 아니... 항문 통증도 낫고, 변도 나오네...? 충격받은 나는 '전청조 사건'으로 열변을 토하는 단톡방 친구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오늘 대야에 뜨건 물 넣고 똥꼬 케겔 운동했다가 오르가즘 접신 느꼈어... 태어나서 느낀 거 중에 거의 최고로요. 소리 지름... 더 놀라운 건 너무 아팠는데 이렇게 하니 갑자기 낫는 거야... 상처 난 대장에 뜨건 물이 들어와서 마비되는 바람에, 흥분되면서도 안 아파진 걸까...? 하... 모르겠네..."
"이야... 이래서 애널섹스하나...?
"똥꼬가 익은 거 아닙니까? 곱창전골처럼요... 죄송합니다..."
"똥꼬 미디움레어."
왠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하... 내일 다시 여정 보고하겠습니다."
"요청한 사람도 없는 데일리 똥꼬 보고... 하지만 기다리겠습니다. “
“진짜 고통이다 타지에서... 쾌유를 기원합니다..."
"남자친구도 똥꼬 안 봐주는데 우리가 얘기라도 들어줍시다."
그렇게 마법같이 항문통증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이상한 거에 중독된 게 아닐까... 싶어 (뜨거운 사우나에 중독된 아저씨들처럼 뜨거운 좌욕에...) 물의 온도는 좀 내려가며 했더니 이제 좀 살 거 같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은 못 하지만 항문통증에 시달리는지 알게 되었다. 욕창 걸린 할머니부터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아토피로 항문이 헐은 아기들, 애널섹스로 기쁨도 느끼지만 고통도 느끼는 사람들, 출산으로 아랫도리가 망가진 임산부들과 미국에서 의료 보험 없어 자가 치료 전문가가 된 사람들까지... 평소 안 아프고 제 역할을 해내던 똥구멍의 노고를 너무 모른 척한 게 아닌가. 새삼 미안하고 고마워졌다.
그리고 '진짜 신음소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도 좋아서 낼 수 있는 소리가 있단 말이지... 아니, 여자들은 진짜로 안 느끼는데도 이렇게 연기해 주는데 남자들은 느끼면서도 소리 제대로 안 내?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소리쳐! 더 크게! 신음소리!" 그러자 조금씩 쾌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