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연륜이란 게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34살인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애매하지만... 과거의 나보다 더 나은 마음의 태도를 지닐 때 특히 그렇다. 이를테면 어떤 일에 너무 속상해하지 않을 때, 상대가 바뀌길 강요하지 않을 때, 과도하게 미안해하며 나를 낮추지 않을 때... 써 보니 ‘오바 쌈바 하지 않고 가만히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때‘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구나. 근데 아이를 낳으면 전전긍긍하거나 욕심날 일이 많아질 텐데, 그건 어른이 되는 과정이면서도 동시에 어른이 되기 어려워지는 과정인가. 육아만 그렇겠나. 산 넘어 산인 인생의 많은 과정이 다 그럴 텐데... 어쩌면 어른은 허구의 개념인지도?
예전에 ‘어린 여자랑 나이 많은 남자가 만날 때 어린 여자는 주의해야 한다. 나이 많은 남자의 연륜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나이 되면 다 가지는 거고, 그놈은 능구렁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땐 흘러 넘겼는데 요즘 내가 어린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만약 내가 그와 동갑이었다면 이 순간에 다르게 행동했을 것 같은데’ 싶은 게 좀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게 되는 걸 보면 위의 말은 맞는지도.
글쓰기 모임을 하면 사람들이 다 글을 잘 쓴다. 그래서 며칠 전엔 나도 모르게 이런 얘길 했다. ’웃긴 사람이 코미디언 되는 거 같죠? 아니더라고요.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코미디언에 되는 거지.‘ 최근 유튜버 이연의 창작에 관한 에세이 <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와 마티 출판사에 나온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라는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를 보면서 좀 놀랐다. 둘 다 지독히도 창작의 불안에 대해, 어려움에 대해, 그럼에도 결국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특히 후자는 짧은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편이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변주인데 매번 재밌다. 그걸 매일 조금씩 읽다 보니 그냥 다 불안하고 모르겠는 게 디폴트구나 싶다. 다만 계속하거나 멈추는 선택지가 있을 뿐이라고. 자신이 멈추지만 않으면 계속해나갈 수 있다고.
돌이켜보면 나도 누가 포기하라고 한 적 없었다. 그냥 다 내가 그만둔 거지. 그런데 그만 안 두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냥 그렇게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는 김연아의 말이 ‘힘들어도 견디고 하는 거야’ 같아서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젠 좀 다르게 들린다. ‘그냥 진짜 암 생각 없이 계속 해나가는 겨...‘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는 자격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웃기지 않아, 끼가 많지 않아, 사람들 웃기는 거 안 좋아해 (사실 좋아하면서). 하지만 웃긴 사람이 코미디언이 되는 게 아니라 코미디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코미디언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럼 나는 코미디언이 되겠는가? 예스입니다 싶은 거다. 나에게 코미디는 인생의 슬픈 일들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힘듦을 덜어주는 거니까. 웃겨야 한다는 강박, 웃기지 못한다는 수치심에서 벗어나 ’오바 쌈바 하지 말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내 자리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