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 교수님과 만나다
시카고에서 한국인 교포가 만든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보았다. 동양인 출연진으로 쇼를 구성한 프로듀서 백 윌리엄은 말했다. “이 쇼의 목표는 우리가 여기 있음을 알리는 거야. 사람들이 시카고를 생각할 때 동양인을 떠올리진 않으니까.” 하지만 쇼가 시작되자 토종 한국인인 나는 의문이 들었다. ‘저 사람이… 동양인이라고? 미국인 아냐…?’ 인도인, 베트남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필리피노까지. 한 번도 내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아시아계 미국인(Asian American)이라는 정체성 아래 비슷한 차별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음날, 윌리엄이 다니는 대학 교정을 거닐다 흥미로운 포스터를 봤다.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한국과 그 불만’(Feminist, Queer, Crip: South Korea and Its Discontents). 페미니스트, 퀴어, 장애를 기반으로 한 소수자 정체성으로 한국 사회를 새롭게 보는 수업이 열리니 관심 있는 사람은 참여하라는 공지였다. 궁금한 마음에 담당자를 찾아보니 90년생 한국 출신 여자 교수님이었다.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따고 탈식민과 한국학을 연구하는 그분께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인터뷰를 빌미 삼아 티타임을 요청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학생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싶을 때 관심을 가지는 학문은 '한국학'보단 ‘ASIAN STUDIES’인 것 같아요. 미국에서 겪는 차별은 한국인이어서가 아닌 아시아인이어서가 더 크니까. 나라별로 다루기보단 포괄적으로 묶어 그 안에서 다양한 커뮤니티들이 어떤 갈등을 경험했는지 배우죠.”
아빠가 인도인이고 엄마가 백인인 코미디언에게 ‘그럼 너 같은 Half people들은 뭐라고 불러?’ 묻자 ‘mixed.’라고 한 대화가 생각났다. ‘혹시 나 뭐 말실수한 거 아니지?’ 하자 웃으며 아니라고 해줬다. 한국에선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한다 생각했는데 여기선 쉽지 않다. 며칠 전엔 친구에게 '너 패션 테러리스트 같아...' 하자 미국에선 그런 단어 민감하단다. 피곤하네... 내가 한국에서 째려보던 남자애들 마음도 이런 거였을까. 내가 한국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윌리엄은 이 곳에서 Asian Studies를 공부했던 것 같다. 아직 한국에선 소수자, 다양성 담론이 여전히 차순위 과제처럼 여겨지는데 미국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을까.
“어디에서 누구와 얘기하냐에 따라 다를 거예요. 혹시 Ethnic Studies 학문 아시나요? 인종학이라고 번역하긴 좀 애매한데, 미국의 유색인종 학생들이 '나도 미국 사람인데 왜 우리에 대해 배우는 학문은 없느냐.' 시위를 해서 만들어진 학문이에요. (Asian Studies와는 또 다른가요?) 네. 아프리카나 라틴, 인디언, 아시안 등 모두를 포괄하죠. 60년대에 대학가에서 시작한 운동인데 미국의 다양성 담론에 큰 영향을 줬어요. 아무리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지낸다 해도, '그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한 문제니 까요. 큰 기여를 했죠."
하지만 미국 사회도 여전히 문제는 많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고 많이 수용을 해야 된다'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긴 했지만 실제로 그걸 어떻게 실천하는지 보면 접근 자체가, 기존의 틀이 있고 품어주는 느낌이다 보니 그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는 편이에요. 소수자 정체성이 더 이상 소수자 정체성이 아닌 순간부터가 좀 더 제대로 된 실천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 시도들을 하는 문학이나 문화에 관심이 가요."
다수와 소수의 관계를 해체하는 시도들에 그는 관심이 많았다. 여성학과 장애학, Ethnic Studies 등은 그쪽 분야의 대가학문이었다. 내가 글을 쓴다 했을 때 '어떤 글을 써? 너만의 전문 분야는 뭐야?'라고 경제학 박사생이 물었을 때, 나는 '음... 여성학'이라 말하면서도 왠지 자신이 없었던 적이 있다. 이거는... 작은 일 같아서. 나에 관한 일 같아서. 그러니까 나는 겨우 나밖에 모르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렇게 소수자 정체성 자체를 놓고 연구하는 학문들의 지니는 사회적 가치, 그들이 오랜 시간 만들어 놓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비판들을 떠올리니 얼마나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일인지...
"미국은 곧 인구의 다수가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와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래요. 하지만 숫자의 문제일까요? 아무리 숫자가 많아진다 해도 기존에 있던 성차별, 인종차별 등이 바로 없어지진 않을 거잖아요. 패러다임에 대한 전환이 필요하고, 우리가 계속 개입하고 바꿔나가야 할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가서야 볼법한 주제들. 교포,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한 사람들)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나라 밖에선 더 자주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한국에만 있어서 관심이 없었다가, 밖이 궁금해 나가보고 싶어지다 보니, 어쩌면 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눈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요즘 쿠바와 미국을 횡단하는 한인 교포 여성들에 관한 다큐를 요즘 보고 있는데 흥미로웠다면서 추천했다.
“같은 교포여도 이야기가 다르고 역사가 다를 수 있는 게 느껴져서 흥미로웠어요. 쿠바나 남미 카리브 쪽에 사시는 교포분들은 미국 교포 이야기에 가려져 굳이 찾지 않는 이상 듣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고요. 또 요즘 관심 있는 책이 <Deadpan: The Aesthetics of Black Inexpression>인데 시카고 대학에서 블랙 스터디랑 영문학 가르치는 교수님의 신간이에요. 'deadpan'이라는 단어는 진지하고 웃기는 이야기를 무표정하게 정색할 때 쓰는 말인데, 코미디의 한 장르이기도 해요. 그게 어떻게 생겼고, 왜 필요한가에 대해 다루는데 일단 주류적인 코미디는 아니거든요. 책에서 말하길 이런 비주류 유머는 미국 흑인 문화에서 발달했는데,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고 드러내지 않는가'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보니 그걸 어떻게 유머로 승화하는지 등에 관해 다뤄요. 마침 요새 그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소수자 이야기를 다루는 책 중에 '감동적이지 않게' 쓴 서사들이 많더라고요. deadpan 적인 요소들이 많길래 왜 그럴까? 이게 비주류의 말하기, 유머라면 주류의 유머는 뭘까? 미국의 스탠드업도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해지고 '앨리 웡' 같은 인물이 스포트라이트도 받지만, 아직도 코미디는 ‘내가 생각하기에 웃긴 게 웃긴 거야. 왜 그거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질문하는 거지?' 같은 태도가 있다 보니, 웃기는 거에도 정치적인 면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뭐가 웃기고, 웃기지 않은지. 어떤 거에 대해선 왜 웃으면 안 되는지. 그런 거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해요."
주류가 아닌 이야기를 볼 때 전복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비로소 어떤 것이 주류가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한국의 자부심이 느껴져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새로운 주류문화가 형성되는데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신경 써서 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한국이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 아닌, 좀 더 통합적인 문제에도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니까요. 이를테면 한국 사회가 소수자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에 관한 문제들. 거기에도 자긍심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수업을 들은 미국 학생들이 만든 잡지에는 ‘여성가족부의 미래’ ‘한국의 비만에 대한 공포’ ‘흑인을 희화화하는 한국 소년들’ ‘트랜스 혐오의 역사’ ‘몰카와 엔(n)번방’ 등이 소개됐다.
“학생들은 막연히 ‘미국의 페미니즘이 한국의 페미니즘보다 앞서갈 것’이라 생각하고 수업을 들으러 와요. 하지만 한국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장애에 대한 담론이 오래됐다는 것을 알면 쉽게 말할 문제도 아님을 배우죠. 한국 근현대사에 있는 징병제가 젠더 불평등에 영향을 끼쳤고, 그것에 미국이 역사적으로 기여한 부분도 크다는 것을 배우니까요. 자신이 몰랐던 한국이 거기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깨닫죠. 한국에 관한 것을 가르칠 때 기지촌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 것도, 거기서 생성된 젠더·인종·장애·혼혈 문제가 결국 주류를 재생산했으니까요.”
그제야 윌리엄이 왜 나보다 기지촌 문제에 빠삭한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가르치는 수업의 제목은 '장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장애는 아직 잘 모르는 문제. 장애가 없는 사람도 장애학에 대해 알아야 할까.
“자신한테 일어나지 않으면 사실 굳이 그거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죠. 근데 장애를 다루는 문제들이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니까.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떤 장애가 없어야 하는가 장애학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다뤄요. '장애가 없어야만 갈 수 있는 길이다 보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일상에서 보기 어렵다.' 이것도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이니, 장애가 없는 사람도 거기에 영향받죠.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도 나를 만드는 일부이기 때문에, 저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장애학에 관한 책 한 권을 추천해 줬다. <Crip Genealogies> “앤솔로지(일정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따른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출판한 책)인데 에디터 중에 한 분이 한국학이랑 장애학 공부하시는 분이세요. (Eunjung Kim) 기존에 백인 위주의 주류적인 장애학을 넘어 젠더, 비서구, 인종 등을 통해 장애를 재조명하는 좋은 책이에요.”
영어를 못 하지만... 일단 받아 적어 왔다. 마지막으로 그럼 페미니즘은요? 미국의 페미니즘은 어떤 게 흥미롭죠?
“저 보기에 가장 흥미로운 연구가 일어나는 곳은 블랙 페미니즘과 퀴어 스터디인 것 같아요. 특히 블랙 페미니즘은 에스닉 스터디와 젠더학 둘 다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들을 조명하고 있어요. (왜 거기서 다루지 않나요? 다루는 거 아닌가요?) 다뤄야 하는데 제대로 안 다뤄지는 부분들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일을 블랙 페미니즘에서 많이 해요. (그렇군요. 저는 록산 게이밖에 모르는데... 누구 추천해 주신다면?) 오드리 로드(Audre Lorde) 그리고 최근에는 사이디야 하트먼(saidiya hartman) 정도가 일단 생각이 나네요.”
즐겁고 어려운 1시간 반 가량이 흘렀다. 이제 일어서야 할 시간. 어쩌면 나는 교수님과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수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느라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할수록 그녀가 부러웠다. 유수의 대학에서 영어로 학문을 가르치다니... 나는 학생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려워 눈물이 나는데... (왜 영어를 못하고 멍청한지...)
“다른 유학생들이 교수님을 참 부러워할 것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되실 수 있었던 거죠.”
“글쎄요. 꼭 그럴 것 같지도 않아요. 좋은 직장이고 만족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다른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에에? 나는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워낙 능력자라 그런가...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농담으로 많이 얘기하는데 ‘리서치’가 ‘Me서치’라고. 사실은 다 나에 관한 연구라는 말이 있어요. ‘내가 이걸 왜 연구하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다 보니,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내가 이런 연구를 하나 보다 알게 되죠. 나에 대해."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니."
"그런데 나에 대해 궁금한 부분들은 그걸 해결하기 위해 다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다른 선택을 했을 때 됐을 수도 있는 나, 다른 경험을 하는 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런 궁금증은 왜 있는 거죠?”
“만약에 내가 계속 한국에 있었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지금이 싫어서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냥... 저는 그게 궁금해요.”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아, 며칠 뒤 한국에서 전화 온 친구에게 말했다.
“야, 니는 이런 적 있나?”
“지금의 나 말고 다른 나? 아니... 별로 안 궁금한데.”
“맞제? 내도.”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내 안에 어떤 개념이 생긴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세상엔... 이런 감정도 있어, 하는
당신도 언젠가 느끼게 될거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