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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Oct 11. 2023

인간에게 씨앗처방을 내림


23년 가을




땅콩을 거두었고, 아주까리밤콩잎이 말라 바스러지고 있으니 곧 털어야 하고, 토란도 서리가 내리기 전에 캐야 한다. 수세미가 이십여 개 정글같은 잎사이에 걸려있고, 두어 개는 말라 껍질이 누렇다. 자라기를 넘어선 것들. 자란다고 하는 것을 보는 건 무, 배추, 돌산갓과 쪽파가 전부이고 이도 길어야 한 달이면 뽑아야 하는 생물들이다. 하나둘씩 두둑이 흙더미로 남는 것이 아쉽다. 작년까지는 무배추를 거두고 나면 텃밭생활을 정리했다. 어차피 내 소유의 밭도 아니니 겨울을 나는 마늘이며 양파도 심을 수 없으니, 그랬다. 가을이 깊을수록 다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마치 상사병같다. 아쉬움은 아프다. 그런데 올해 봄을 돌아보니 4월은 돼야 분양한 텃밭을 오픈했더랬다. 3월까진 나고 자라는 것을 나는 볼 수도, 먹을 수도 있음을 왜 이제야 떠올렸는지. 예를 들면 월동시금치, 냉이는 가을에 씨를 뿌려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내고 나면 춥긴 해도 이른 봄의 것들을 기를 수 있단 말이다. 온전히 일 년을 나의 땅으로 지을 수 있단 말이다. 왜 마늘과 양파를 심지 못해 아쉬워했을까. 어쩔 수 없는 것은 마음에서 비우고 덜 아쉬울 수 있는 길을 찾으면 이렇게 있는데 말이다. 땅콩을 수확하고 민둥 한 꽤나 긴 두둑에 월동시금치를 심을 생각에 설렌다. 추운 것이 나의 움츠려드는 육신만큼이나 생각과 마음에도 작용하는 것 같다. 생동하는 모든 것들이 이제 멈추는 때라고 생각해 온 것 같다. 추위에 씨앗을 심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2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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