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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남 Feb 15. 2020

딸과 함께, 웨딩드레스

내 딸 선영이

딸과 함께웨딩드레스 


“선영아!” 

“예, 아빠” 

자기 방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던 선영이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빠가 무슨 제안을 할까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래전 아내가 미국 위스콘신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아내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선영이와 초등학생인 재영이를 데리고 매디슨으로 떠났다. 나는 졸지에 언론에서만 접하던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2년 후 아내와 재영이는 돌아왔지만 선영이는 그곳에 남았다. 매디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영은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였다.

 

늘 나를 따르고 응원해주던 선영의 오랜 부재가 가끔은 나를 공허하게 만들었다. 선영 자신도 엄마 따라서 미국 갔다가 홀로 남겨져 그 오랜 시간 어린 나이에 외로움을 극복하며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게다. 하지만 선영이는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아빠가 힘들게 번 많은 돈을 자기가 다 쓴다며 늘 부모에게 미안해하던 철든 딸이었다.

 

선영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제주도에 있었다. 선영이도 귀국 후에 취직을 하게 되어 서울과 제주로 떨어져 우리는 여전히 함께 지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주말에는 나의 예쁜 딸을 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내 딸 선영이가 5월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것도 미국 아이와……. 


선영이는 결혼과 이주 준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런 것도 다행이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때마침 3월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늘 떨어져 지내던 딸과 두 달간 종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또한 함께 해야 할 것도 많아 더욱 좋았다. 


지켜보니 선영이는 결혼 준비로 많이 분주했다 우선 인터넷을 통해 적당한 웨딩드레스를 구매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위해 라호야에 있는 교회를 섭외했으며 여러 종류의 초대장을 디자인해서 충무로에 있는 인쇄소를 찾아 제작했다. 또한 피로연의 메뉴를 정하고 식당도 예약했다. 그리고 들러리들이 입을 드레스도 구매하여 미국에 있는 집으로 배송시켰다. 이러한 많은 일들을 선영이는 이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야무지게 착착 진행해 나갔다. 


국내에서 치르는 일반적인 결혼식이 아니라서 딸이 결혼을 하는데 부모로서 해 줄 것이 별로 없었다. 생각 끝에 나는 선영이에게 피로연에서 입을 한복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아빠에게 부담주기 싫다며 사양했지만 몇 차례 설득하자 기쁜 마음으로 받겠다고 했다. 


나와 선영은 괜찮은 한복집을 알아보고 찾아가서 옷을 맞추었다. 두 차례 가봉을 한 후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예쁜 한복을 받았다. 선영이는 한복을 맞추고 가봉하러 다니는 내내 행복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보석상에 들러 한복에 어울릴 쌍가락지도 맞춰 주었다. 이것으로 선영이의 결혼 준비는 다 된 듯싶었다. 


어느 날 집 근처를 지나다 패션학원 입구에 붙은 광고 안내문을 보았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들어보라는 내용이었다. 그 광고를 본 후 나는 살짝 흥분되었다. 선영이가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학원으로 들어가서 조건 등을 알아보고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갔다. 


“네 웨딩드레스 직접 만들어 보면 어떻겠니?” 


선영은 자기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며 아빠와 함께 만들면 의미가 더욱 깊을 거라고 기뻐했다. 우리는 곧바로 패션학원으로 가서 등록하고 선영은 다음날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선영이와 나는 웨딩드레스 제작을 위해 광장시장으로 가서 원단과 각종 부자재를 샀다. 선영이는 기본적인 바느질은 할 줄 알았지만 양재에 대해서는 아무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용어도 잘 못 알아듣겠다면서 낙담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영을 격려했고 결국 선영의 인내와 노력 그리고 타고난 재능으로 한 달 만에 웨딩드레스를 완성했다. 그 드레스는 초보가 한 달 만에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멋진 웨딩드레스였다. 드레스의 완성과 함께 딸과 함께 보낸 두 달 간의 나의 행복한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은 부모로서 마땅히 기뻐할 일이지만 먼 이국 땅에 선영이를 혼자 남겨놓고 돌아오는 길은 허전하기만 했다. 아내와 둘째 아이가 출근하고 나서 거실에 혼자 앉아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선영이가 다가와 와락 나를 껴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아빠 오늘은 또 어디 가고 싶으실까?” 


나도 모르게 복도 끝 선영이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선영이가 쓰던 방은 결혼식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내와 함께 깨끗하게 치워서 빈 침대와 선영이 쓰던 화장대만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무심코 화장대 서랍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선영이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선영이가 드레스를 만들며 사용했던 작은 반짇고리, 메모지에 선영 특유의 글씨체로 적은 강의 메모와 숫자들…….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선영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언제나 내게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선영에게도 우리와 함께했던 시간이 늘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될 것을 믿는다. 그 시간들이, 그 경험들이, 그 기억들이 그 아이가 앞으로 맞게 될 세월 속에서 때로는 참고서로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작은 미소로 그렇게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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