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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남 Mar 18. 2020

아빠, 바나나 구워주세요.

나의 귀여운 채리 피커

아빠바나나 구워주세요 


재영이 어렸을 때, 뉴욕 출장을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낯선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호기심과 그곳에서 경험하게 될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었다. 특히 뉴욕은 세계 제1의 도시로서 많은 매력이 곳곳에 녹아 있는 곳이다. 맨해튼의 거리를 바쁘게 걸어가는 뉴요커들과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을 보는 것만도 즐거운 눈요기가 되었다. 소호나 그리니치 빌리지 같은 조용하고 예술가풍의 동네와 월가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마천루, 저녁이 되면 고층빌딩에서 뿜어 나오는 야경, 도시 곳곳의 길거리 음식부터 고급 음식점까지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나를 더욱 설레게 했다. 특히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공연하는 뮤지컬과 센트럴파크의 가을 풍광 등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뉴욕이 나에게는 제일 매력적인 도시였으며 그곳에 갈 준비를 할 때부터 이미 마음이 들뜨곤 했다.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맨해튼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하고 일주일 동안 머물 방으로 올라갔다. 맨해튼 빌딩 숲이나 센트럴파크가 보이는 멋진 풍광을 기대했으나 앞에 있는 빌딩에 가려 경관은 그리 좋질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질 못 했다. 가방을 풀어 옷을 정리하고 아직 햇볕이 따가운 맨해튼 거리를 걸으려고 밖으로 나왔다. 분주히 움직이는 대중들 사이로 조금 걷다 보니 타임스퀘어가 나왔다.  전에 아내와 뮤지컬을 보려고 할인 티켓을 샀던 박스로 가서 오늘 공연할 뮤지컬 목록을 보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뮤지컬을 보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약간은 설레었다.


거리를 좀 더 걷다 눈에 띄는 베니 하나라는 식당으로 들어가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이른 저녁을 먹었다. 나는 술을 잘 못 하지만 분위기가 좋아 맥주를 한 잔 마셨더니 취기가 좀 올라왔다. 즐겁고 흥겨웠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오니 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딱히 더 할 일도 없어 대도시의 야경을 즐기며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TV를 좀 보다가 자려고 누웠는데 시차 때문인지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그렇게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서야 새벽을 맞았다. 나는 맨해튼의 새벽이라는 호기심에 끌려 가벼운 차림으로 호텔 밖으로 나왔다. 골목길로 접어드니 아직 이른 새벽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일터로 향하고 있었고 쓰레기차도 분주히 다니며 밖에 놓인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궂은일을 하는 사람일 듯하다. 평소에는 생각해 보질 못했는데 새벽길을 골목골목 누비며 걷다 보니 ‘이런 분들이 있어서 거대한 도시가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분들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아직 이른 새벽인데도 문을 연 식당들이 다수 있었고 식당마다 사람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끌리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물론 호텔에서 아침을 무료로 주긴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새벽부터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끼어 아침 한 끼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식당은 오픈 주방이었는데 멕시코 계통으로 보이는 한 직원이 프라이팬에서 연신 바나나를 구워 한 곳에 쌓아 놓고 있었다. 나는 주방 한편에 수북이 쌓인 구운 바나나를 보고 문득 재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했기 때문에 출근 전에 재영이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아침에 무언가를 먹이는 것이 큰 과제였고 나도 가끔 아이들을 챙겼다. 하루는 내가 아침 식사로 재영이에게 바나나를 주었는데 재영이는 그 바나나를 구워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바나나를 굽다니! 나로서는 생각도 못 해본 발상이었다. 아침 시간이라 시간에 쫓기기도 했고 사실 재영이는 호기심도 많고 평소에도 엉뚱한 짓을 많이 해서 또 아빠를 골탕 먹이려 한다고 오해를 했다. 그날 나는 어린 재영이를 호되게 야단치고 우리 부부는 단합하여 재영이를 몰아붙치며 울먹이는 재영이를 어린이 집에 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구운 바나나가 뉴욕 골목식당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다. 아마 재영이는 늦은 오후 어린이집에서 돌아와서 엄마와 아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TV를 보다가 바나나를 구워 먹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TV에서 본 구운 바나나가 먹고 싶어 아빠에게 말했다가 엄마 아빠에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쓴다고 꾸중까지 들었으니 그때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문득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마음이 아파졌다. 


구운 바나나가 포함된 세트 메뉴와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먼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구운 바나나 맛을 보았다. 바나나는 버터를 넣어 구운 뒤 시나몬과 시럽을 뿌려 낸 것 같았다. 바나나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당장이라도 재영이가 보고 싶어 지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집에 돌아가면 선영이와 재영이에게 바나나를 구워줘야지……. 

“재영아! 아빠가 정말 미안했어.” 


일주일 후 집으로 돌아와서 뉴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해 주고 재영이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바나나와 재료를 사다가 팬에 구워 함께 먹었는데 재영이는 기대했던 것만큼 그리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사실 재영이는 부모에게 바나나 구워달라고 했다가 구박받은 일은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져 있었고 구운 바나나보다는 내가 뉴욕에서 사 온 장난감과 비디오테이프, 초콜릿, 드레스, 비옷 같은 선물에 훨씬 더 많은 흥미를 보였다. 


이 같은 아이들과의 간극, 앞으로 얼마나 다른 것을 보며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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