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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남 Jan 04. 2020

우리의 목욕탕 여행은 끝이 났다

내 딸 선영이

우리의 목욕탕 여행은 끝이 났다


아내가 입원했다. 임신중독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날 나는 회사 18층 창가에 서서 아내가 입원한 산부인과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튿날 아내는 수술을 마치고 링거와 몇 개의 호스를 몸에 달고 의식 없이 나왔다. 그 모습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내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충격적이었다. 누워있는 모습이 몹시 가여웠다. 아직 마취가 깨지 않은 무의식 상태에서도 아내는 고통스러운 양 얼굴을 찌푸렸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 옆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몹시 안타까웠다. 


병원에서 며칠 간의 입원 생활을 끝내고 우리는 마침내 사랑스러운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회복할 때까지 처음 며칠은 장모님께서 아내를 돌봐 주셨다. 나도 퇴근 후에 집으로 와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해 보았으나 여러 가지로 미숙해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은 정말 고된 일이었다. 두 시간마다 우유를 먹여야 했고 수시로 기저귀도 갈아주어야 했다. 밤이 되어도 육아는 지속하였다. 잠을 못 자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두 달간의 육아 휴가가 끝나가자 아내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빨리 회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좀 지나서 할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우리 첫 아이의 이름은 안선영(安宣映)이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는 엄마 아빠도 잘 따르고 제법 자기 의사 표현도 하게 되었다. 

어느 주말 오전에 내가 목욕탕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선영이가 자기도 아빠 따라서 목욕탕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선영이가 너무 어려서 위험하다고 생각해 좀 망설였다. 그런데 아내가 조심해서 잘 데리고 다녀오라고 해서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그 시간에 잠시나마 집에서 좀 편히 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집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가면서 아빠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함께 목욕하러 갔던 이야기며 목욕 후에 할아버지가 자장면을 사 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 소재가 떨어지면 이미 했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주어도 선영이는 재미있게 잘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선영이는 나와 같이 있을 때 끊임없이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던 것 같다.


선영이와 처음으로 탕에 들어갔던 날 선영이는 탕 안의 많은 사람과 목욕탕의 내부가 몹시도 신기한 듯 큰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감기고 샤워를 시킨 후 의자를 내주며 “선영아, 아빠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해” 하고 온탕이나 사우나에 들어갔다 왔다. 물론 나의 시선은 늘 선영이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위험한 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꽤 오랜 시간인데도 얌전히 앉아서 아빠를 기다려 주던 선영이는 정말 ‘신기한 아기’였다.


선영이가 조금 더 성장하면서는 우리도 목욕 후에 자주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곤 했다. 선영이는 나와 목욕탕에 다니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나도 예쁜 딸과 목욕탕 가는 것이 늘 즐겁고 행복했다. 대중목욕탕으로의 여행은 선영이가 여섯 살 될 때까지 지속하였다. 어느 날 목욕탕에 도착하니 매표소에 있는 직원이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예쁜 숙녀가 또 오셨네요. 이젠 너무 커서 남탕에 가는 것은 좀 어렵겠는데요.”

이것으로 우리의 목욕탕 여행은 끝이 났다. 여섯 살 꼬마지만 눈치가 말짱했던 선영이가 당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늘 이른 아침, 샌디에이고에 사는 선영이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남편과 함께 시댁이 있는 뉴욕에 갈 거라 했다. 

“아빠, 12월의 마지막 날은 타임스퀘어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지낼 거예요.” 

선영이는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곳에 가면 아빠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아요. 아빠와 맨해튼 거리도 걷고 맛있는 것도 먹고 뮤지컬도 보고했잖아요.” 

“그래 생각난다. 아빠도 그 시절이 그립구나. 그런데 선영아, 네가 어렸을 때 아빠와 목욕탕 다니던 기억이 나니?” 

“그럼요, 생각나고 말고요. 아빠가 머리도 감겨주고 음료수도 사주고 목욕 후엔 자장면도 먹고…….”

선영이는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마치 며칠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말을 이어갔다.

“아빠, 저는 아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많아 제 삶이 풍요로운 것 같아요.” 

“아빠,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선영이의 따뜻한 말 한마디 때문에 내 눈가는 이내 촉촉해졌다. 

그래 선영아, 아빠도 너를 사랑한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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