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니체를 인용하는 자기계발서가 위험한 이유

#6 니체의 힘에의 의지

자기계발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니체가 아닐까 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해 줄 뿐이다"라는 말은 니체를 알지 못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경구인데요.


니체의 책 곳곳에서 보이는 지만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문장들은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각성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자기계발서에 담기에 너무나 위험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강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예찬하는 동시에 약자에 대한 연민을 질병이라고 말할 만큼 냉철한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민을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입니다.


연민을 느낀 다음 약자를 돕는 행동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연민의 가치를 부정하진 않죠.


하지만 니체는 우리의 상식과 정반대 편에 서서 연민은 인간을 하향평준화하는 질병이며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타인을 연민하고 동정하는 건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전염됐기 때문이며, 그저 그 사람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뿐이라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연민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은 고통을 마치 삶의 재앙으로 여겨,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벌 떨 정도로 유약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


그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같은 허약한 마음을 버리고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니체의 이런 면모를 분석한 글에는 항상 이런 댓글이 달립니다.



"그건 당신이 니체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니체는 그렇게 폭력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연민을 질병이라고 보는 관점은 그의 책 일부분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면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생각입니다.





니체가 연민을 질병이라고 본 이유는?




니체는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투쟁과 정복을 위해 무한히 뻗어나가려는 힘에의 의지가 인간을 더 위대한 존재로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보는 생명력은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유기체가 가진 생명력은 본질적으로 성장하고 지배하려는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자신보다 약한 대상을 끌어당기고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니체는 본능적인 생명을 아무리 순화시켜서 표현한다고 해도 착취라고 말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독일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좀 더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침해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냉혹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 해도 적어도 착취이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니체, 김정현 역, 책세상, 2014. P.273


그가 바라보는 인간은 힘에의 의지를 내뿜으며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존재여야 했습니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아래 글에서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에너지를 의지라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뜻을 함께합니다.



하지만 두 철학자는 “그 의지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는 인간 삶의 고통을 유발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세상과 나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만물에 대한 연민을 통해서 부정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의지는 능동적으로 발휘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 찾아오는 고통 역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죠.


그리고 그렇게 고통을 기꺼이 무릅쓰며 강자가 되려고 하는 이가 인간이라는 종을 고양시켜 왔다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서로 지배하려는 생명력의 부딪힘 속에서 승리한 강자들이 인간을 더 고귀한 존재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가 생겨났다고 분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은 지금까지 귀족적인 사회의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 이와 같은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나 가치 차이의 긴 단계를 믿어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니체, 김정현 역, 책세상, 2014. P.271



어떤 죄책감과 동정심도 느끼지 않고 생명이 본질적으로 가진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는 것.


그리하여 위계질서의 최상단에 올라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것.


이것이 니체가 바라보는 인간성의 본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평범한 다수는 소수의 탁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위대한 인간의 탄생을 위해서 평범한 약자들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니체는 보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인간을 하향평준화하는 연민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죠.


이것이 그가 연민을 질병이라고 말한 이유였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러한 니체의 철학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형식적이라고 해도 모든 개인은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하며 평등하다고 전제합니다.


이런 점에서 소수의 위대한 인간을 위해서 다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은 귀족주의 사회를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린 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중요한 건 연민과 동정을 무가치하다고 본 니체의 생각이 완전히 우리의 삶을 비껴나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에서도 극단적으로 들리는 니체의 철학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연민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던 니체의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철학을 우리의 현실로 끌어와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연민을 인간을 하향평준화하는 질병이라 말했던 니체의 철학이 우리 시대를 파고들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남들과 평등해지길 원할까요?



경쟁에서 승리해 더 많은 이득을 가져가려고 할 때, 누군가의 지시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지시할 수 있는 삶을 꿈꿀 때, 연민을 부정한 니체의 철학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연민을 바람직한 가치라고 여기지만 나 자신이 경쟁에 뛰어든 상황에서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경쟁을 통해 선발된 소수에게 권한과 대가를 모두 부여하는 적자생존의 게임에 참여할 때 연민은 무가치 해집니다.


예를 들어 전 재산을 걸고 빚까지 얻어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경쟁사가 고꾸라지기를 원할 겁니다.


심지어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보다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그 회사를 무너트리는 것을 더 중요한 목표로 설정할지도 모르죠.


경쟁 회사가 망했을 때 사장과 직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은 연민할 일도 심지어 고려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수능 시험이 끝난 뒤 원하던 대학에 예비 1번을 받은 수험생은 어떻게든 이탈자가 생기길 바랄 겁니다.


만약 집에 돈이 없어 입학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학생 대신 입학할 수 있다면, 그 학생을 연민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겠죠.


오히려 정부에서 따로 제도를 만들어 돕는다고 한다면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나와 거리가 먼 상황에서 우리는 약자에 대한 연민을 바람직한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 상황에 놓였을 때는 연민을 느낄 만한 여유는 없습니다.


경쟁에서는 약한 것을 나의 지배하에 만들려는 에너지, 성장하고 뻗어나가려는 에너지인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이는 오늘날 자기계발 담론이 각광받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벗어나 큰돈을 만지고, 타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지금 당장 성공을 위한 삶을 시작하라는 자기계발서들에서는 약자에 대한 연민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자기계발서의 멘토는 성공한 강자의 입장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 거냐고, 언제까지 약자로 살 거냐고 다그칩니다.


당장 많은 사람들과 격차를 벌리고 그들을 고용해서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는대도 불구하고 왜 행동하지 않느냐면서요.


성장과 성공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는 "성장하고 뻗어나가려는 힘에의 의지를 발휘해 약한 것을 지배하라"라는 니체의 말을 순화해서 다시 쓴 책일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니체의 잠언이 인용되는 상황이 우연은 아닌 것이죠.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이 개개인에게 중요한 삶의 목적으로 떠오르고, 또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담론을 가치 있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연민을 부정한 니체의 철학은 우리 시대를 비껴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능력주의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지금, 연민을 무가치하다 보고 더 강한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는 니체의 철학은 어쩌면 더 본격적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니체의 말을 조심스럽게 들어야 하는 이유




니체는 경쟁 사회에 놓은 우리들의 경험을 잘 설명해 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니체의 철학을 끌어와서 강자의 지배와 경쟁적인 사회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하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김진석 교수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를 참고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니체가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고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는 힘에의 의지가 향하는 바가 경쟁에서 승리해 돈을 벌거나 자리를 차지하는 정도를 상정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이라는 종을 향상시키기 위한 위대한 모험은 자신의 목숨까지 걸 수 있을 정도의 도발적이며 창조적인 행위인 동시에 새로운 가치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철학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니체는 현대인의 공통적인 목표인 풍족한 일상에서 여유롭게 사는 삶을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는 짐승들이 누리는 '녹색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평안한 일상을 사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니체가 바라보는 '위대한 인간'과 우리가 바라보는 '위대한 인간'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더 심각한 괴리는 니체는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 타인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소수의 합격자가 열매를 모두 차지하는 시험과 같은 방식의 경쟁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니체는 강자가 되려고 하는 힘과 덕을 강조했지만 그는 생명체의 존재 목적이 하나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는 사실입니다.


니체는 강자의 존재론적 힘과 덕이 아무리 철학적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더라도 결코 현실에 속에서 그대로 발현하거나 실현되기는 어렵다고 보았죠.)1


이런 점에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해줄 뿐이다"라는 니체의 경구를 자기계발을 북돋는 동기부여 메시지와 일치시켜 사용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뜻이 통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의 철학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폭력성이 담겨 있고, 이미 니체조차도 자신이 말하는 철학의 실현 가능성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으니까요.




연민, 

심각한 질병과 숭고한 사랑의 사이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남들과 평등해지지 않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도 기꺼이 참여합니다.


또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강한 자만이, 현대적인 언어로 노력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냉혹한 사실도 받아들이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약자에 대한 연민을 실천하는 삶을 숭고한 삶이라 믿는 독실한 민주주의자가 되기도, 연민을 인간을 하향평준화하는 질병으로 여기는 열렬한 니체주의자가 되기도 어렵습니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연민에 대한 가치 평가에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연민을 심각한 질병이라고 여기는 관점과 숭고한 사랑이라고 여기는 관점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양면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니체의 철학을 통해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니까요.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스토랑이었습니다.



<인용>

1)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p.51



<참고문헌>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3], 움베르토 에코, 리카르도 페드리가, 윤병언 역 , 아르테, 2021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새뮤얼 이녹 스텀프 외 1명, 이광래 역, 열린책들, 2018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니체, 김정현 역, 책세상, 201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장희창 역, 민음사, 2020.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김진석, 개마고원, 2009.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서상복 역, 을유문화사, 202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