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수도권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가격이 미친 듯이 폭등하던 부동산, 주식 안 하면 바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종목을 가리지 않고 고점을 찍던 주식, 회사 밖에서도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무자본창업과 퍼스널브랜딩..
희망찬 미래를 그리게 해 주던 이 모든 서사들이 끝나지 않는 불경기에 꿈처럼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다리면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오겠지만 하루 버티기도 힘겹다는 외침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옵니다.
1,000조가 넘어버린 가계대출과 2천만 원 아래로 떨어져 버린 자영업자들의 평균 소득이 그 증거겠지요.
살아가는 게 힘겨울 땐 흔히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챙기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조차 어렵다면, 인간의 삶이 원래부터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깨달음으로부터 마음의 평온을 얻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때 다시 찾아볼만한 철학자가 바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입니다.
"세계는 지옥이다",
"개인의 불행은 예외로 보이지만 이 세상은 어디나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행복은 고통이 적은 상태만을 의미하며 그 행복조차도 곧 권태로워진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산다는 건 고통이고, 오래 산다는 건 더 오래 고통받는 것뿐이었죠.
어쩌면 그의 말대로 삶을 산다는 건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온갖 질병이 창궐하고, 비극적인 사고가 벌어져왔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당연한 날들로 생각하지만, 인간 문명의 역사에서 평화는 전쟁과 전쟁 그 사이에 있는 잠깐의 휴식과 같은 것처럼 보이죠.
개인의 삶 역시 고통의 연속입니다.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놓지 못하고 결핍과 갈망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개개인의 속한 위치에서 적게 가진 사람들은 적게 가진 사람들끼리, 많이 가진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들끼리 더 많은 걸 가져가기 위한 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집니다.
투쟁 속에서 패자는 모욕감과 상실감을 떠안으며 고통을 느끼고, 승자는 전리품을 몽땅 챙겨가며 잠깐의 행복을 느끼죠.
그러나 그렇게 느낀 행복은 멀지 않아 권태로움으로 바뀌고 맙니다. 인간은 내 손에 들어와 당연해진 것들에 대해서는 금방 싫증을 느끼니까요.
가진 것에 권태를 느끼는 순간 인간은 다시 또 욕망을 추구하며 고통받습니다.
이렇게 얻기도 힘들고, 느끼고 있어도 금방 권태로움으로 바뀌어버리는 행복은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작용하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은 정도의 상관없이 강렬하게 우리에게 작용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인간은 건강할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구두가 작아 발이 조금만 죄어와도 금방 고통을 느낍니다.
또 자신이 하던 일이 순탄할 때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그것에서 스트레스를 받죠.
지금까지 100억을 벌었어도 당장 내일 잃게 될 10억에 전부를 잃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게 인간입니다.
게다가 심각한 병에 걸리는 고통,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크나큰 고통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금방 사라져 버리는 행복과 달리 고통은 우리에게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식어구를 모두 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일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고약하다. 앞으로 점점 더 고약해질 것이다.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까지"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쇼펜하우어, 권기철 역, 동서문화사, 2020, p.17
라고 말하며 "삶은 고통이라는 걸 인정하라"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받아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까지 드는데요.
그렇다면 쇼펜하우어는 왜 그토록 인간의 삶을 비관적으로 보았을까요?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찬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을까요?
오늘은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 그리고 <철학적 인생론>, 이렇게 두 권의 책을 바탕으로 그의 철학을 알아보겠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왜 욕망하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자신이 하는 행위의 배경이나 근본적인 이유를 모른 채 삶을 살아갑니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 자신의 삶이 얼마만큼 불행하든, 얼마만큼 행복하든 상관없이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합니다.
"왜 살아남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살아남고자 하는 삶에 대한 의지는 이미 발동되어 있죠.
마찬가지로 식욕을 느끼는 것에도, 성욕을 느끼는 것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인간은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내 삶을 꾸려 나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며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한걸음 한걸음 미래를 향해 직접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등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삶에 대한 의지는 모든 개인의 판단과 생각에 앞서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정한 삶의 목표에 따라 산다기보다 일단 세상에 나와 삶의 의지를 발휘해 살아가면서 적당한 목표를 찾는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아무리 멋지게 포장해서 인간 삶에 의미를 부여를 한다고 해도, 결국 모든 인간은 삶의 의지의 발동으로 맹목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죽지 않고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합니다. 하지만 '채워질 수 없음'을 전제하는 욕망의 특성상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충족되지 못하죠.
돈을 욕망하는 인간은 돈을 벌면 벌수록 더 큰돈을 벌고자 하고, 권력을 욕망하는 인간은 힘이 세지면 세질수록 더 큰 힘을 갈구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도 못하죠.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자신이 원했던 것을 이뤄가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선 금방 권태를 느끼는 존재이기에 성취를 통해 찾아오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잠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 역시 권태라는 고통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도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권태로움을 부여잡으며 사는 삶이기 때문이죠. 권태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갈구하면서 쟁취하기 위해 열중하는 사람은 죽음을 고려하지 않지만, 삶의 권태로움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니까요.
쇼펜하우어가 보는 인간은 욕망하는 데서 오는 고통에 신음하거나, 권태로움에서 오는 고통에 신음하기를 반복하며 매 순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죠.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삶을 철저한 고통이라고 본 쇼펜하우어에게는 어떤 해결책이 있었을까요?
쇼펜하우어는 굉장히 철학자 다운 방식으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논하려면 먼저 그의 세계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이유와 근원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이고 생명의 원리이자 에너지입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세계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면,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선 신의 자리를 의지가 대신합니다.
둘의 차이는 신은 도덕과 윤리의 근원으로 우뚝 서서 인간을 심판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이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신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죠.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어떤 원인과 목적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의지의 작용에 떠밀려 살면서 인간은 고통을 느끼죠.
세계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의지라면, 그래서 모든 인간이 의지의 작용에 떠밀려 산다면, 본질적으로 나와 타인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내적 원리에 의해서 추동하는 존재이니까요.
그러나 인간은 각자의 타임라인에서 자신의 공간을 점유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개별화되어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 에너지인 의지는 모든 세기의 달력과 지도를 가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는다고 해도 의지의 작용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죠.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그저 의지의 표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표상의 세계에서 나와 타인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의지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한 존재라고 보았죠.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쇼펜하우어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방법은 개별화의 원리를 극복해 타인을 연민하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윤리적인 경구로 만든다면
이 세계가 나와 하나임을 깨닫고 만물에 고통을 느끼며 금욕적인 삶을 살아라!
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먼저 '나 자신'이라는 틀에 갇힌 개별화의 원리 극복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삶의 의지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꿰뚫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나의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하지만 내가 살고자 하는 이유가, 돈을 좇고자 하는 이유가, 무언가를 탐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이유가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서 비롯됨을 깨닫는 순간 욕망의 헛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은 결국 동일한 힘, 맹목적인 의지에 떠밀려 자신의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와 저 사람이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의지의 세계에서는 결국 같은 존재라는 걸 인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동일성에 기반한 연민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우리는 탐욕을 부리며 나의 몫을 빼앗고자 하는 경쟁 상대조차 연민할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의지라는 시계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삶의 의지에 떠밀려 자신이 왜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또한 힘겨운 상황 속에서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로 인한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를 연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이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의해 고통받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개별화의 원리를 극복한 인간은, 자신과 남을 구분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만물이 곧 나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 다다라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되죠.
세상의 모든 고통을 떠안으면 자신이 추구해 왔던 쾌락에서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포기와 체념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에 기반한 금욕에 가까워지는 첫걸음이 됩니다.
이때부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애써 찾을 필요도 없고, 애착을 느낄만한 대상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는 곧 세상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지는 '무의 상태'에 들어감을 의미하죠.
이런 태도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소박한 태도와도 다릅니다. 어떤 것도 가질 필요도, 가질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권태를 느낄 여지도 사라집니다.
이렇게 만물을 연민하며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태도는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게 만드는 삶의 의지를 부정할 수 있다면, 그때 인간은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죠.
이 세계가 나와 하나임을 깨닫고 만물에 고통을 느끼며 금욕적인 삶을 살아라!
어떠신가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으신가요?
그가 말하는 방법은 마치 경지에 도달한 성인의 삶의 태도와 비슷해 보입니다. 더불어 불교철학의 향기가 물씬 풍기죠.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자들 중 불교를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철학 속에는 '세상'과 '나'가 하나라는 불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묻어 나옵니다.
이제부터 논의해 볼 점은 "우리가 쇼펜하우어의 인생관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선 개개인의 평가가 다를 텐데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한 독일 철학자의 평가를 소개하는 것을 이번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의 저자인 미하엘 하우스켈러는 고통을 벗어나는 쇼펜하우어의 방법에 대해서 이러한 의문을 제시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자유롭고 어떤 법칙에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의지는 의지다. 다시 말해 의지는 본성상 의지를 발휘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의지는 언제나 존재하고자 의지를 발휘하며 세계에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의지에 반할 수 있는 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의지가 무언가에 의해 부정당할 수 있다니 완전히 미스터리다.
[왜 살아야 하는가] , 미하엘 하우스켈러, 김재경 역, 청림출판, 2022p.58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의지이며 이것은 어떤 법칙에도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의지를 멈추게 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그런 힘을 가진 의지를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완전히 미스터리라고 미하엘 하우스켈러는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쇼펜하우어는 마치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도 있고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가 만물의 내적 원리인 의지가 가진 불가항력적 작용에 대해 설명하면 할수록, 삶의 의지를 부정하고 무의 상태로 들어가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말이 점점 더 궁색하게 들리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고통이라고 말했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사합니다. 물론 이 관점은 매우 어둡고 비관적이어서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요.
때때로 우리는 삶 속에서 극복하기 어렵다고 느낄 정도의 고통에 직면합니다.
이때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철학이나 인간의 삶을 예찬하는 철학에서 도움을 받긴 어렵겠죠.
그럴 때 인간의 삶은 원래부터 고통이었고, 타인에 대한 연민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제안은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볼 만합니다.
오늘날에도 인생을 뒤흔든 시련을 겪고 종교에 귀의해 모든 대상에 대한 연민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오늘 말씀드린 내용과는 반대로 "연민은 무가치하다"라고 말했던 니체의 철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요즘에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주제가 있거나, 알아보고 싶은 철학자가 있는 분은 댓글에 남겨주세요 : )
새로운 글에 담아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 쇼펜하우어, 권기철 역, 동서문화사, 2020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쇼펜하우어, 권기철 역, 동서문화사, 2020
[왜 살아야 하는가] , 미하엘 하우스켈러, 김재경 역, 청림출판, 2022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새뮤얼 이녹 스텀프 외 1명, 이광래 역, 열린책들, 2018
[즐거운 서양철학사], S.P 렘프레히트, 김문수 역, 동서문화사, 2017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서상복 역, 을유문화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