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스토랑 Nov 27. 2023

한국인 10명 중 6명이 무교인 이유는?

#5 믿음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생기는 철학적인 문제


종교 유무를 묻는 25년 간의 설문조사에서 처음으로 무종교인의 비율이 60%를 넘었습니다.

(개신교 관련 조사통계 전문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2022년 2~11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9182명을 대면면접 조사한 결과)


무종교인의 비율이 53%였던 2017년도와 비교하면 5년 만에 10%나 더 높아진 거죠.



@사진 출처: [넘버즈] 206호의 기독교 통계



더 주목할 건 29세 이하에서는 5명 중에 무려 4명이 무종교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진 출처: [넘버즈] 206호의 기독교 통계


이는 앞으로도 무종교인의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질 거라는 걸 뜻하죠.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는 크게 3가지였는데요.


1)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40%)

2)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28%)

3) 신앙심이 생기지 않아서(18%)


@사진 출처: [넘버즈] 206호의 기독교 통계



무종교인이 많아지는 것도 눈에 띄지만 종교에 관심이 자체가 떨어지고 있다는 게 더 의미심장합니다.


종교에 실망을 느낀 사람은 마음을 돌려볼 여지라도 있지만, 관심 자체가 없는 사람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28%)"이라고 답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른 이유들은 모두 "종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요?


혹시 종교를 믿지 않으면서 생기는 문제는 없을까요?


이 두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믿음이 사라지는 세상에서는 어떤 철학적 문제가 생기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종교인의 숫자가 적어진다는 건 당연한 현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과학의 유산으로 세워진 문명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현대 사회는 믿음 대신 검증된 지식을 추구하는 지적 태도 위에서 발전한 과학 기술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 교육 역시 과학적 탐구 방식에 맞춰서 디자인 돼왔고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믿는 능력이 아니라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사회로 나와 몸담게 되는 대부분의 조직에서도 근거를 기반으로 논리적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중요시하죠.


특히 인터넷을 통해서 사용자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할 수 있게 되면서 이 흐름은 더 가속화됐습니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 현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 가장 발 빠르게 변한다는 마케팅 업계인데요.


옛날에는 번뜩이는 있는 광고를 만들어서 막대한 매출 상승 만들어 내는 '광고의 신'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광고의 신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010년도부터는 감으로 승부하는 마케터들의 자리를 사용자들이 남긴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선의 전략을 제시하는 '그로스 해커'라는 데이터 전문가들이 대체했습니다.


한 사람의 감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쪽으로 마케팅 전략이 변화한 거죠.


이건 꼭 마케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는 건 이제 기본 소양이 됐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온 현대인들이 모든 의심을 덮어두고 종교의 교리에 따라 무작정 신을 믿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탈종교화 현상은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저는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 종교 갖느냐 안 갖느냐는 탈종교화 문제의 핵심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무의미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에 관한 논쟁은 단순히 종교적인 논쟁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엔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은 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게 만들기 때문이죠.


근거 없는 믿음 대신 근거가 확실한 사실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타당합니다.


하지만 명확히 가치와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것들만 손에 쥔 채 우리는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까요?


엄격한 근거를 따져 묻는다면 우정, 사랑, 행복 같은 것들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뿐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죠.


물론 아무 문제 없이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면 삶의 의미를 굳이 따져 물을 필요도 없고,


설사 삶의 의미를 못 찾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전쟁이 터져서 매일 죽음의 공포에서 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서 혼자 남겨졌다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크게 실패했다면 어떨까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서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은 고단한 현실에서 신음하다 삶의 의미를 묻게 될 겁니다.


그러다 결국 이유를 찾지 못하면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내릴 수도 있죠.


"나는 증명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가치를 믿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건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삶의 의미를 오로지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물질적 가치에서 찾게 만들기 때문이죠.


실제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냉정한 현실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 볼 만한 통계 2가지가 있는데요.


2021년도에 퓨리서치센터라는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에서 세계 17개국 1만 9,000명을 상대로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을 주제로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17개국 중 14개 국가 사람들은 가족을 1순위로 뽑았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1순위 건강을 꼽았고, 대만 사람들은 사회라고 꼽았습니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충분한 수입, 빚이 없는 상태, 음식, 집 등이 포함된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꼽았습니다.


저는 이 통계가 한국의 높은 자살률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2003년도 이후 2016년~2017년을 제외하고 OECD 회원국 중에 자살률 1위에 올라있습니다.


OECD 평균과 비교하면 2배나 높은 수치죠.


이 두 가지 통계를 바탕으로 물질적 가치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면 시련을 견디는 힘이 그만큼 적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가치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마이너스 통장은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의 사고 체계에서는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팩트를 이겨낼 다른 가치를 찾아내기 어렵죠.


눈으로 볼 수 있고, 수치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내 삶마저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만들기 때문에 시련을 극복하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믿음과 용기를 앗아갈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명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던 여러 믿음 제거해 왔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우리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죠.


실제로 과학과 기술의 논리가 세상을 집어삼켰던 20세기 무렵 중요한 철학적 화두는 논리적 추론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에 깊게 빠졌던 철학자가 바로 키에르케고르와 까뮈였는데요.


이 두 철학자의 생각을 소개해 드리고 오늘 주제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히 덧붙이면서 이번 글을 마치겠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키에르케고르와 까뮈




삶의 무의미함을 마주했을 때 우리에겐 크게 3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의미한 삶을 포기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 대상을 찾아 그것을 추앙하는 거죠.


세 번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초연하게 사는 거고요.


첫 번째는 합당한 선택지가 될 수 없으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방법인데요.


쇠렌 키르케고르(1813년 5월 5일~1855년 11월 11일) 덴마크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사회비평가.


키에르케고르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선 신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음에도 객관적으로 신을 증명하는 게 개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는 점인데요.


그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서 신은 객관적인 진리로서가 아니라, 주관적인 진리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펼쳤습니다.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 내가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 신의 무한한 가능성이 내 삶에 깃든다고 본 거죠.


그는 '주관적 진리'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논증하지 않고도 신을 통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안 했습니다.


다음은 알베르 까뮈가 제안하는 방법인데요.


알베르 카뮈(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 작가, 언론인이자 철학자.


어떤 것에도 확실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모든 것의 가치가 동등해진다는 게 까뮈의 생각입니다.


삶의 무의미함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모든 가치의 위계질서를 무너트리는 것과 같습니다.


돈을 버는 게 의미 없다면 부자가 되는 것과 거지가 되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고,


명예를 얻는 게 의미 없다면 권력자의 삶과 소시민의 삶의 가치는 차이가 없는 거죠.


*아래 글에 까뮈의 생각을 더 자세히 담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까뮈의 생각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는데요.


그가 1,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세상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펼쳤다는 걸 고려하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까뮈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잃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슬픔을 딛고 살아가는 방법은 딱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삶의 무의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천국과 지옥의 가치를 동등하게 만드는 거죠.


이 방법으로 그는 전쟁 후 현실이라는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습니다.




과학의 시대에서도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남겨둘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풀 수 없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말끔히 설명해 주는 간편한 해결책으로 넘어가는 게 저는 내키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신을 옆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나에게 정말 큰 시련이 닥쳤을 때 신을 믿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실하는 비극을 마주 했을  때 저는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습니다.


그때는 신이든, 운명이든, 뭐든 나에게 닥친 이 비극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는 위안을 얻고 싶을 것 같아요.


가 신과 같은 초월적인 가치에 기대지 않고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건 인생이 무너지는 위기를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삶의 의미를 따져 물으며 절규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다면 전 까뮈의 제안을 고려해 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지 않는 한 까뮈 조언대로 살 수 있다고 절대 말할 순 없겠죠.


이처럼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땐 과학자의 태도를 유지하되, 삶을 되돌아볼 땐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겸손함을 갖는 것이


과학과 종교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철학을 공부하는 제가 택한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에겐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모릅니다.


가진 것을 몽땅 잃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내 보낼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사고로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치면 스스로에게 위안 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꼭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가족에 대한 사랑, 친구와의 우정, 삶을 감사하게 여기는 태도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손에 쥘 수 없는 허상의 가치가 위기의 순간에서는 우리를 지탱해 주는 튼튼한 안전장치가 되어주기도 하니까요.


오로지 데이터에 근거한 논리적 판단만이 가치 있다면 인문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계산은 인간보다 기계가 잘하니 몽땅 기계에 맡겨 버리면 사유 따위는 할 필요 없죠.


하지만 우리 삶엔 데이터와 논리로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맥락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때때로 우리는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고민의 답을 찾으려고 하는 거고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허상의 가치가 때로는 우리 삶을 떠받치기도 한다는 것.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해 왔는지 조금 더 와닿지 않으실까 합니다.


그럼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치고 저는 다음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



[참고 문헌]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강성위 역, 동서문화사, 2020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민음사, 2022


이전 04화 신은 과연 존재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