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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Apr 06. 2024

딸기잼을 만들며

  쌀쌀한 봄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걷고 있을 때였다. 길가 과일 트럭에 싱싱한 딸기가 눈에 들어왔다. 냉큼 딸 기 한 상자를 샀다. 딸기잼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잼은 1810년 나폴레옹 시절 전쟁 식량의 한 방편으로 개발되었다. 살균된 유리병에 과일과 설탕을 끓여 식힌 것을 밀폐하면 언제 어디서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당시의 방법 그대로 21세기를 사는 나도 잼을 만들려고 한다. 


개수대 안에 가득 찬 초록 꼭지에 매달린 빨간 열매가  침샘을 유혹한다. 씻던 딸기 한 알을 입에 쏙 넣는다. 상큼하면서 달콤한 과육이 입안 가득 찬다. 큰 냄비에 딸기와 설탕을 넣어 버무린다. 눈 속에 핀 동백꽃이 냄비 속에 서 온통 꽃밭을 이루고 있다. 올봄 오동도에 핀 동백꽃이라 생각하며 끓이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자 딸기 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어릴 적 내가 꿈꾸었던 세상을 향기로 표현한다면 이런 냄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냄비 뚜껑이 들썩인다. 들썩이다 못해 쉭쉭 더운 김을  내뿜는다. 냄비 안을 들여다본다. 딸기와 설탕이 섞이기 시작하며 부글부글 거품이 끓어오른다. 갑자기 어설펐던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소리만 크고 실속이 없었던 그 시절, 하고자 하는 일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 허둥대던 때의 내 모습이 저랬으리라.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위태롭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 우리 여섯 식구는 간단한 살림살이만을 챙겨 대방동 쪽방에 나앉았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 쿠웨이트로 떠났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나의 세상은 바닥부터 무너졌다. 무엇보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동생들의 학업이 걱정이었다. 


결국 맏이인 내가 부모님을 도와야 했다. 냄비 속은 거품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국자를 꺼내어 거품을 걷어 낸다. 꿈 많았던 여고 3학년 시절. 마지막 남은 꿈마저 걷어 내듯 국자로 원을 그리며 냄비 속 거품을  말끔히 걷어낸다.  


딸기와 설탕이 어우러져 녹지근하게 끓는다. 몽글몽글  졸여지며 군데군데 풍선이 생긴다. 한껏 명랑하게 부푼  풍선이 톡톡 터지면서 색이 진해지면서 걸쭉해진다. 뭉근히 졸일수록 설탕의 모습은 사라져 간다. 냄비 속에선 부 푼 동그라미가 계속 터지면서 저절로 녹아들고 스스로 물들이며 저만의 색깔을 만들어 간다. 나도 꿈꾸고 좌절하며, 넘어지면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단단해져 간다. 그렇게  사람과 세월에 부대끼며 꿈꿨던 삶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냄비 속 재료들을 국자로 휘휘 젓는다. 아직 덩어리로 버티는 것은 술래 잡듯 찾아내 눌러 으깬다. 고집부리지  말고 곱게 엉기라고 어른다.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때론 시간이 밀어주고, 채근하고, 손잡아 주듯이. 그저 둥 글게 세상을 살아가도록 돕듯이 국자 젓기를 계속한다.  


딸기잼을 만드는 데도 은근한 인내가 필요하다. 딸기와  설탕이 서로 엉기며 끈기가 생기고, 나도 현실과 타협하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간다. 이제 딸기는 형체가 없다. 검붉은 색과 향기만이 전에  딸기였음을 알린다. 설탕을 만나 불에 달궈지고 뒤섞이며  저만의 독특한 색과 맛을 만들어낸 것이다.


국자 끝에 묻은 잼을 맛본다. 달다. 열탕 소독한 병에 완성된 딸기잼을 담는다. 소독했다는 것은 더 이상 변하지 않고 보존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잼을 맛보듯 나도 맛을 본다면 어떤 맛일까? 어쩌면 나  한승희란 잼은 달콤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달고 쓰고 맵 고 그리고 세월의 아린 맛도 들어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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