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디 흔한 연애 이야기, 그리고 그 후
현지는 봄과 같은 웃음을 지닌 친구였다. 이와 더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여유를 갖고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그녀 주변의 많은 남자들은 그 미소가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행위라 착각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 범주에 속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착각해 피해자(?)인 우리들 모두, 서로서로 상대방이 큰 착각을 하고 있다며 비웃었던 것은 훗날의 깨달음이었다.
그런 거야 어찌 되었든, 나는 첫 학기 7개의 수업 중 3개의 수업을 현지와 같이 듣게 되었다. 같은 과였기도 하고, 1학년들은 보통 듣는 수업들이 뻔하므로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필연에 가까운 우연을, 인연이라 착각하며 그녀와 친분을 쌓기 위해 최선-지금에 와서야 진혁이는 너는 그때 최선을 다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뒤늦은 조언을 내뱉곤 하지만-을 다했다. 다행히 현지와 나는 인사를 몇 번 나눈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근처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눌 기회를 노리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화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인사는 빼놓지 않고 했다는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러운 대화를 상상하다가, 목으로만 말을 삼킨 것이 몇 번 인지 알 수 없어질 때쯤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진혁이가 한 건을 해내고야 말았다.
“우리 몇 주 있으면 중간고사인데 바빠지기 전에 다 모여서 한잔하면 어때?” 우리의 앞줄에 앉아 있던 현지와 그녀의 친구에게 진혁이가 전한 말이다. 그래, 그냥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면 되는 건데. 새삼 친구의 능력에 놀라며, 답변을 기다렸다.
“술? 좋지! 너도 괜찮지?” 차분한 표정과 평범한 옷차림으로 기억되는 현지의 친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있다 수업 다 끝나고 6시에 정문에서 보자!” 진혁이가 우리들을 한 번씩 쳐다보며 말했다. 이 친구가 이렇게 계획성과 추진력이 뛰어난 친구였나 싶어 감탄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옆자리에 앉은 진혁이에게 필담으로 전달한 문구들이다.
‘야 너 대박이다. 근데 6시에 어디로 가려고?’ 두근거림이 묻어나는 글씨체로 진혁이에게 물었다.
‘몰라, 그건 네가 생각해봐’ 짧게 답변을 전한 후 진혁이는 전공책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교수님께서 들어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필담은 진행되지 않았다. 진혁이는 나 보다 훨씬 모범생쪽에 가까운 친구였다.
어디를 갈지에 대한 고민 때문에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에 선배들과 갔던 매운 닭볶음탕을 파는 곳으로 가볼까? 아니야, 거기는 우리 과 선배들이 너무 많이 상주하고 있어. 근처에 조용한 이자카야가 있던데 거기로 가볼까? 안돼, 거기 얼마나 비싼지 알잖아. 그냥 치킨집을 갈까? 맛있긴 한데 거기 너무 시끄러워서 말소리가 안 들릴지도 몰라. 대학로 술집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남녀가 술을 마시기에 적절한 술집을 찾는 것은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차라리 그날 주어진 전공 과제가 오히려 더 쉽게 느껴질 정도-실제론 쉬운 과제는 아니었다-였다.
그렇게 5시 30분이 되어 수업은 끝나고, 사물함에 책을 보관해놓기 위해 이동했다. 현지 일행과 만나기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진혁이에게 이자카야로 가자고 답변했다. 답변과 동시에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술집의 위치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화장실에 가서 최선을 다해서 외모를 점검하다 보니 어느새 이동해야 할 시간이 되었고, 물에 젖은 손을 얼른 씻어낸 후 이동했다.
정문 앞에는 현지와 차분한 표정의 친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손짓을 하며 우리를 부르는 현지의 모습을 보며 살짝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나를 포함해 다른 사람이 그 날 어떤 차림새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현지의 옷차림만은 아직 기억이 생생하다. 하얀색 플레어스커트에 체리 무늬가 있는 보라색 니트 그리고 흰색 운동화를 매칭 한 귀여운 차림이었다. 마른 체형이었던 그녀의 장점을 한껏 살려주기 위해 준비된 옷 들이라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종종 가던데 있는데, 거기로 가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현지는 특유의 미소를 베풀면서 알겠다고 답했다. 진혁이는 자연스럽게 차분한 표정의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친구 덕분에 현지와 나란히 걸으며 이동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시험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 그 교수님 시험 난이도 높다던데 등의 시시콜콜하고 큰 의미가 없는 얘기들을 몇 마디 나누다 술집에 도착했다.
지하로 내려가야 있는 술집으로 내려가면서 너네 발 조심하라는 친절한 멘트를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내려가면서'와 '너네 발' 까지만 실현되었고, 이후의 말들을 내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힌 바람에 모두의 웃음과 함께 흩어졌다. 휴, 창피하지만 뭐 가벼운 웃음을 줄 수 있는 건 나쁜 게 아니지 라고 빠른 자기 합리화와 함께, 직원분에게 자리를 안내받았다. 한쪽에는 진혁이와 나, 반대쪽에는 현지와 친구가 자연스럽게 앉게 되었다.
이제 갓 20살이 된 평범한 남녀가 모였을 때 할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전공과목에 대한 의견의 교류? 현대 사회에 주된 어젠다에 대한 토론? 지나왔던 사랑에 대한 후회와 성찰의 나눔? 흥미로운 의견이지만, 그런 일은 이 나이대 친구들이 술집에 있을 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친분의 부족함에 따른 어색함은 이내 술자리 게임들로 인한 소란으로 치환되었다. 안주는 현지와 친구가 좋아하는 걸로 두 개 정도 시켰다. 게임들로 즐겁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이 생각보다 비싼 곳이라 처음에 꺼렸었다는 기억 자체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각자 1병 정도의 술을 비우고, 약간의 쉬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원래의 계획은 술자리가 마무리될 때쯤 ‘여기는 내가 낼게! 오늘 즐거웠으니까'라고 말하고 현지가 ‘정말? 고마워! 다음에는 우리가 살게’ 정도로 말하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가다간 남아있는 용돈의 대부분을 여기서 소진해야 할 상황이었다. 옆 소변기에 서있는 진혁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약간은 도와줄 수 있으나 본인 또한 상황이 안 좋다며 난색을 표했다. 끙,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오늘은 이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화장실에서 자리로 돌아왔다. 현지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술집에 놀러 온 선배를 만나서 인사를 하는 모양이었던 것 같다. 굳이 인사를 하기 귀찮아 진혁이와 나는 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곧이어 돌아온 현지가 밖에 본인과 같은 동아리 선배가 왔었다고 말했다. 나는 딱히 가입한 동아리도 없었고, 얼굴을 한두 번 본 것 외에는 별 인연이 없는 선배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분명히 재미는 있었으나, 큰 의미는 없는 술 게임이 지속되었다. 모두가 만족할 만큼 만취했을 때, 우리의 테이블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양손 가득 알 수 없는 유리병들을 든 남자였다. 그는 우리들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건방지게도 반말로 인사를 건네고, 현지를 바라보며 적당히 마셔라라고 주제넘은 충고를 한 후, 모두에게 유리병들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현지의 앞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후, 테이블 진동벨 부분을 살짝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내가 처음 접한, 여자들에게는 흔히 ‘매너’라고 불리고 남자들에게는 '지랄'이라 불리는, 빌어 처먹을 늑대 짓이었다. 현지는 이거 마시면 술 금방 깬다고 말하며, 먼저 병을 돌려 연 후 이내 한 병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이나 미소를 지으며 그 빈병을 바라보았다. 나도 현지와 같은 행동을 진행한 후, 쓰레기를 버려주겠다며 현지의 손에 있는 그 병을 잡아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슬쩍 살펴본 계산서에는 10만 원이 넘어간 액수가 찍혀있었다. 숙취해소제 덕분인지, 놀라운 액수 덕분인지 정신이 갑자기 들었다.
남은 술을 이용한 몇 차례의 술 게임들이 더 마무리된 후, 막차시간에 따른 이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가방과 계산서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주머니에는 진혁이가 몰래 넣어준 2만 원이 아쉬운 존재감을 발현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준비한 거라도 잘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까 머릿속으로 준비했던 멘트를 사장님에게 카드를 건네면서 내뱉으려는 찰나, 뜻밖에 소리를 듣게 되었다.
“계산 이미 다 됐어! 땡큐~ 다음에 또 와~!” 사장님의 말을 듣고 일행을 쳐다봤는데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다른 테이블에 있는 친구가 계산하고 갔어! 가도 돼~“ 의문은 이내 해소되었다. 유리병 선배, 그 자식이 계산한 상황이었다. 짜증 나지만, 이 순간은 나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짐이었다. 때로 어떤 유형의 멋짐은 경제력에서 기인하곤 한다. 그리고 이 점은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다. 이후에도 계속 벌어질 예정인 비참함을 나는 이때서야 처음 겪어보게 되었다.
현지와 나는 같은 지하철 방향이었고, 우리에게는 5 정거장만큼의 대화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는 그 기회를 심각한 표정과 함께 침묵으로 소진해버렸고, 상대방 또한 별 대화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억지로 끌어낸 듯한 시답잖은 대화와 침묵을 반복한 이후,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 떠나가는 지하철 속 현지는 반짝이는 눈을 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래, 유리병 그 자식에게 거는 통화였다.
- 나는 이 글이 실제가 아니었으면 해 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