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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로 Oct 30. 2020

나는 이 글이 실제가 아니었으면 해 4

오랜만에 술자리 그리고 예상 못한 젠장


‘카톡! 카톡! 카톡!’


 정신없이 아침 업무를 처리하던 중, 갑자기 연달아서 울리는 소리들에 놀라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소음에 민감한 옆 자리 선배의 눈빛이 서늘하게 느껴져 이내 폰을 들어 무음 모드로 전환했다. 미리 보기 기능을 통해 올라오는 카톡들을 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연달아 있었으나, 대화 내용들은 결코 나를 향한 것들이 아니었다. ‘말 좀 하고 만들지…’ 분명히 진혁이의 짓이 뻔할 거라 생각하며, 화면을 오른쪽으로 슬라이드해 단체 대화방을 열어보았다. 역시나 예상한 대화방에 예상한 대화들이었다. 오늘 예정되어있는 술자리에 늦지 말고 오라는 진혁이의 말과 시시껄렁한 동기들의 농담들. 깜짝 손님도 있을 테니 기대하라는 진혁이의 말은 뭔가 싶었지만, 일 때문에 딱히 집중해서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쨌든, 오늘은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끼리 만나는 자리였다.


 칼퇴를 하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신을 차리니 시계가 벌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걸 문득 깨닫고,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짐을 챙겨 회사를 나왔다. 다행히 약속 장소는 멀지 않아 큰 걱정은 없었다. 오랜만에 가는 충무로역, 오랜만에 즐길 불금에 기분이 새삼스럽게 좋아졌다. 과 행사가 있을 적엔 일주일에 5번을 간 적도 있을 만큼 단골이었던 충무로역 근처 술집인 하얀 집. 대학 시절 음주의 추억 들의 대부분을 함께하고 있는 장소였다. 사실 과장을 살짝 보태서,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지만 괜히 헷갈릴까 봐 위치를 검색해보았다. 자세히 보니, 어느새 3호점까지 생겨버린 하얀 집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나만 알던 동네 맛집이 갑자기 프랜차이즈화 되어서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음식점이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대학교 근처 술집'보다는 이제는 '충무로역 근처 술집'에 더 걸맞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검색한 결과는 거의 써먹지 않고 느낌대로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 너 왜 이제와!!” 머리를 숙이고 철문을 열며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혁이가 입구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같이 있는 친구들과 더불어 진혁이의 목소리를 들은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진혁이를 한번 쳐다본 후 자연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시선들이 부끄러워 잰걸음으로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진혁이가 안내한 자리에 서둘러 앉은 후, 진혁이의 등을 세게 한 대 치며 말했다. “소리가 너무 크다. 다 쳐다보잖아…”


 “크크 미안, 기분이 좋아서. 자 일단 한잔 마시고 시작해야지?” 진혁이가 건네준 잔에는 비율을 알 수 없는 소맥이 담겨 있었다. 뭔가 불안했지만 일단 원샷을 했다. 어차피 술을 마시러 온 자리였기 때문이다.


 “잘 마시네? 그거 5:5야, 원샷했으니 이제 스퍼트 좀 맞겠다” 


 “… 망할 자식”


 (진혁이를 제외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사는 얘기를 하다 보니 저절로 취기가 올라왔다. 너네 회사는 할만하냐, 나는 거의 죽어간다, 너는 사귀는 사람이 있냐, 언제 결혼을 할 거냐 라는 등의 20대 후반의 친구들이 흔히 할만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일단 나의 답변은 차례대로 X O X X 였지만,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미 어른의 길을 걷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에서의 입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은 나에 비해, 벌써 승진에 결혼에 집 장만까지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니 괜스레 본인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내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 진혁이가 혼자 마시려는 나의 잔에 짠을 청해주었다.


“야 왔다. 왔어.”


“뭐가? “


“여기야 여기! 오랜만이다! 애들아 자리 좀 만들자” 진혁이의 큰 목소리에 입구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 현지였다.




 현지는 ‘여전했다’라는 말이 제대로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한때는 봄과 같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여름철 초록과 같은 성숙함을 지니고 있는 모습이었다.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조금 더 입는 옷들이 고급스러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연보라색 블라우스와 크림색의 슬랙스를 매칭 한 모습은 여전한 그녀의 취향을 반영해주고 있었다. 예전보다 더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로 다가온 현지는 나와 일행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알고 보니 이 자리에는 나와 같이 한 때 현지를 흠모하던 친구들이 과반수인 상태였다. 어느 정도 술도 마신 상태였고,  그녀의 화사함은 여전했기 때문에, 헤벌레함은 이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현지는 그러한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건배를 청했다. 새로운 모습의 현지와 함께, 술자리의 분위기가 더욱 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사는 얘기들만을 하면서 술을 마시다 보니 이내 더 이상 나눌 얘깃거리가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갖는 술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침묵을 차마 참을 수 없었던 누군가가 술 게임을 하기를 권유했다. 소수의 인원이 나이나 유치함 따위의 핑계를 대며 반발했지만, 현지의 대찬성에 힘입어 거리낌 없이 여러 게임들이 시작되었다. 배스킨라빈스니 지하철이니 하는 흔한 게임들이 랜덤게임이라는 구호와 함께 한참을 흘러가다가, 한 친구가 진실게임을 하자고 권유했다. 다 먹은 안주 그릇은 식탁 옆으로 치워졌고, 소주병이 그 위치에 올라간 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의 회전이 지속된 후 이내 멈춘 병 주둥이의 방향은, 현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질문.


 “대학생 때 여기서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있다~ 없다?” 삼류 MC 같은 말투의 진행이었지만, 질문의 내용만큼은 일류였다. 그 자리에 모두가 내심 궁금하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음… 대답 못하면 마셔야 하는 거지?”


 “응 당연하지~!”


 “쳇, 그럼 그냥 말해야지. 있었어!” 현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이내 병을 돌렸다. 


 시시껄렁한 질문과 몇 잔의 잔들이 스쳐간 후, 다시 삼류 MC친구의 차례가 되었다. 그 친구가 잔을 비우고 나자,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다행히 그는 관중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소주병의 주둥이는 그의 능력(?)에 힘입어 또다시 현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지를 향한 두 번째 질문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이 친구는 이류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현지, 그럼 아까 말한 대학생 때 맘에 들었던 사람이 누구야?”


 “뭐? 그걸 말해야 해?


 “말하든 말든 네 자유인데, 지금은 벌주가 좀 다른 거 알지? 네가 직접 탔잖아” 현지의 앞에는 그녀가 다음에 걸릴 사람을 위해 직접 탄 노란빛이 흐릿한 소맥잔이 위치해 있었다.


 “… 말하면 되잖아”


 “누구~~~?”


 “김진혁”


 “응?” 안주를 추가하기 위해 메뉴판을 보고 있던 진혁이가 짐짓 놀라 현지를 쳐다봤다.


 “너였다고, 그때 마음에 들었던 사람.”


 진혁이의 표정에서는 당혹감이, 현지의 표정에서는 설렘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까 내가 OX로 설명했던 것들에 대한, 현지의 답변은 O O O O 였었다. 딱히 뭘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젠장 그리고 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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