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Oct 15. 2023

이건 어쩌면 연애담

자그마치 20년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맺은 관계였고, 그만큼 그녀는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했고, 그만큼 사랑했기에 상대방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손을 내밀고 앞장서서 그를 도왔다고 했다.

상대방 역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줬고, 그녀를 아껴줬다고 했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최고의 동반자가 되어 평생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별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게.


처음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질 나쁜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뒤에는 네가 내게 차마 이럴 수는 없을 거라고 상황을 부정했으며, 그동안 내가 네게 해준 게 얼만데 네가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냈지만, 종국에는 그동안의 시간과 그녀의 노력이 부정당한 것만 같아 비참해졌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순식간에 직장을 잃었다.


오전 6시 40분.

이른 아침에 사무실을 청소하러 온 사람들이 퇴근하고,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한적한 회사 건물.

나는 그 시간에 그녀를 만났다. 박스를 끌어안고 어색한 표정으로 입가만 간신히 끌어올려 웃는 척하는 그녀를.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짐을 빼러 왔다고 했다. 명목상으로는 비밀유지계약 (Confidentiality agreement) 때문이지만, 사실은 쪽팔려서 도저히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없어서라고.


일터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고 걱정스러웠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을 수도, 차후 계획도 물을 수 없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만 봐도, 입을 한번 열 때마다 젖어들어가는 눈가만 봐도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공중에 순식간에 휘발되는 가벼운 말만 나누고 그녀는 재빨리 사라졌고,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나는 평소처럼 커피를 타러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면접관 중 한 명이었던 그녀. 합격 후 축하한다며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주던 그녀. 그 회사에서 오래 일했던 만큼 그녀는 아는 사람도 많았고, 직장 동료는 물론 부하직원들에게도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직장에서의 그녀는 대체로 행복해 보였고,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구조 조정 얘기가 나올 때 당연히 그녀가 그걸 기회 삼아 다시 한번 승진할 거라 예상했다. 


그랬던 그녀가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불과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그녀를 생각하면 할수록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연애 10년에 결혼생활 5년. 대학 때 만난 첫사랑, 남편이 된 첫 남자친구.

그렇게 오래 만나면 지겹지도 않냐는 우리의 짓궂은 농담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행복하다고 말했던 그녀.

서른 살의 생일에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모자라, 일방적으로 이혼 통보를 받았던 그녀. 


그때 친구 역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현실을 부정했다가, 화를 냈다가, 스스로를 책망하다가, 결국에는 체념한 듯했지만 여전히 밀려오는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결국 눈물을 흘려내던. 




회사는 그녀가 떠나간 뒤에도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갔다. 

그녀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지만, 회사에게 그녀의 부재는 비용 절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환영받았고, 남은 이들은 이기적 이게도 그 빈자리가 회사가 원하는 충분한 숫자를 만들어줬기를 바라며 숨을 죽였다. 


이혼을 통보당한 친구는 그 후에 출근까지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도리어 불륜 상대를 버젓이 친구들 모임에 데리고 나오며 도리어 이혼한다는 사실을 축하받고자 했다. 


사랑할 때 약자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 관계를 놓지 못하는 사람이 약자다. 

그게 사랑 때문이든 정 때문이든, 갈등이 생겼을 때 관계의 절단보다 타협 혹은 자신의 희생을 선택하는 쪽. 나의 불편함, 혹은 괴로움보다 관계의 유지가 더 중요한 쪽. 


상대방이 알아주던 아니던 우리는 나만은 알고 있는 그 타협과 희생의 과정을 거쳤기에 그 관계가 기어코 끝나버렸을 때 충격을 받고 상처 입는다. 그 뒤에 따라오는 자괴감과 모멸감, 후회 따위는 덤이고. 


만약 사랑의 척도를 우리가 상대방을 생각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의 총량으로 결정한다면, 하루의 대략 삼분의 일을 일터에서 보내는 풀타임 직장인에게는 회사가 우리의 절절한 연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건 그저 시시한 연애담일 지도 모른다. 한때는 그 존재만으로도 설레었고, 혹시 버림받을까 봐 애절하게 매달리기도 했지만, 거듭된 다툼과 배신으로 이제는 너를 적당히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그런 연애 n연차의 시니컬한 고백, 혹은 넋두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