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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15. 2023

우리 사이 갑과 을

그건 세 번째 외도였다.

첫 번째는 밴드 활동을 하다가 만난 사람이었고, 두 번째는 애완견을 데리고 갔던 동물 병원의 수의사. 그리고 세 번째는 온라인 활동으로 만난 사람.


나는 그녀가 그 소식을 전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내내 한 단어를 떠올렸다.


Divorce.

이제야 이혼을 결심했나 보다.


그런데도 친구의 입에서는 끝끝내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처받은 얼굴과 체념으로 생기가 빠져나간 병자 같은 꼴을 하고서도 그 말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보다 못한 내가 먼저 묻자 그녀가 말했다. 그가 이혼하잔 말을 아직 꺼내지 않았다고.


벌써 그 말도 세 번째로 들었다.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시 이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은 거라고. 이 결혼을 파탄 낼만큼 외도 상대들과 진지한 관계를 맺은 건 아니니 실수 혹은 충동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나 좋자고 이혼해 버리면 아이는 어떻게 하냐고. 아이는 무슨 죄냐고.


그렇게 또 2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소식을 전해왔다. 이혼하기로 합의 봤다고.


갑자기 왜?라는 내 물음에 그녀가 고백했다.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그 후 삼 개월 뒤 둘은 빠르게 같이 살던 집을 정리하고 헤어졌다. 그토록 걱정하던 아이의 시간은 부모가 일주일 단위로 잘라서 나눠 가지기로 합의한 체로.




보통 연인 관계에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을이라고 한다.  더 많이 사랑하니까 알아서 희생도 감수하고,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상대방과의 관계가 종료되는 게 더 두려운 사람이 을이다. 그게 사랑 때문이든 이해관계 때문이든 상대방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 혹은 그 사람 외의 선택지가 없는 사람.


이혼을 결심하기 전 친구의 모습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개 같은 상사, 이기적인 동료, 무능력한 후배. 제때 오기는커녕 매달 지각까지 하는 월급, 말로만 전해지는 복지, 매년 건의를 해도 바뀌지 않는 업무 처리 방식.


매일 출근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꾸며내려고 해 봐도 문들어진 속이 뿜어내는 한숨까지는 막지 못했다. 스트레스로 푸석해진 몰골을 보고서도 누구 하나 괜찮냐는 안부 대신 자기 관리에 소홀한 거 아니냐는 걱정도 아닌 돌려 까는 핀잔이나 듣는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데 막상 퇴사를 생각하자니 막막하다. 당장 매달 독촉장을 보내오는 온갖 납부고지서는 물론이고, 내가 없으면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나, 내가 퇴사한 뒤 내 일을 대신 맡아야 하는 남겨진 동료들 걱정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주위에서는 해고 통보받고 하루 만에 짐 싸서 쫓겨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나쁘진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해고당한 건 아니잖아, 라며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고, 심란한 마음을 술로 달래며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낙관론을 머릿속에 주입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친구의 남편도 그랬지만, 회사 역시 우리의 상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별을 통보받지 않은 건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알아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찾아 스스로를 그 기대치에 맞춰 욱여넣으며 그들의 눈치를 보는 을이니까. 


을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내 선택지를 늘리면 된다. 상대방을 덜 사랑하면 된다. 아니, 다른 이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여기 아니면 갈 곳 없는 사람은 '너 아니어도 괜찮아'하는 사람에게 이길 수 없다. 

여기 아니라도 오라는 곳 많은 사람은 굳이 한 회사에 목을 매달지 않아도 된다. 오라는 곳이 없어도 상대방이 나를 원하게끔 만들 자신과 능력이 있으면 이직 준비를 하면 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의 유능함이 그 회사, 그 업무에 한해서만 해당되는 거라면? 해당 조직 내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인재이지만, 밖에서는 전혀 수요가 없는 유능함이라면? 


잔인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그 회사의 유능하고 부리기 좋은 수족관 물고기가 된다. 잃을 염려도 없이 내 어장 안에 잘 갇혀서 화려하게 유영하는 물고기.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면 회사에게 강제로 방생당할 수도 있는. 15년 동안 그 회사에 몸 담았고, 시무식 혹은 종무식에서 CEO에게 직접 호명되어 박수도 종종 받았던 S가 구조조정의 희생자로 먼저 잘려 나간 것처럼. 


연애도 비슷하지 않던가. 진짜 인기인은 자기의 현재 연인에게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고, 누구와 함께 하든 멋진 연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의미로 혹시라도 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외도(!)를 권해보고 싶다. 


을의 생활에 길들여지면 자꾸만 상대방의 눈으로 나를 보게 돼서 내 진짜 가치를 잊기 쉬우니까. 당신에게 갑질을 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처음에 그 사람이 당신과 사랑에 빠졌고, 그 회사가 당신을 채용했지. 


굳이 관계를 끊어내기 위한 외도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시간 틈틈이 구인란도 보고 지원서도 슬쩍 넣어보면 된다. 그러다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내가 먼저 결별을 고하면 되고, 안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실패해도 그 자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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