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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15. 2023

연애한다고 다 사랑하진 않는다

한 남자가 있었다. 5년 동안 사귄, 심지어 양 집안에서 다 알고 결혼 소리까지 오가는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였다. 


그 남자가 어느 날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감정을 누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심지어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여자친구에게 이별부터 통보하고 왔다고 했다. 그래야 내가 자신의 마음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그 절절한 마음이 믿어지지 않았고, 의심스러웠고, 두려웠지만, 결국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 후 삼 개월 뒤 남자는 이별을 고했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가 너무 크다고. 힘들다고.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제는 내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를 다독이고, 내가 더 잘하겠다고, 애절하게 마음을 고백하고 그를 붙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괜찮아진 줄 알았지만, 남자는 한 달 뒤 다시 이별을 고했고, 그 후 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갔다는 소릴 들었다. 


순식간에 운명적 사랑의 주인공에서, 남의 운명적 사랑을 돈독하게 해주는 장치 1인 바람녀가 되어 버린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귀를 막고 사실을 외면하고, 이건 분명 그와 내가 주인공인 러브스토리일 거라 믿으며 그에게 매달리고, 술에 취해 그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에 숨겨진 결말 따위는 끝끝내 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사랑 따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몇 개월 후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만났고, 그 뒤에도 한국 사람은 물론 외국 사람과도 몇 번의 연애를 했고, 지금은 외국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둘 낳아 잘 살고 있다. 




미디어 매체에서 소개되는 모습을 보면 다들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서 연애에 성공하기 때문에 한때 나는 사랑과 연애가 동의어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고 나니 그제야 그 둘이 무늬와 형태가 비슷하긴 하지만 다른 존재라는 걸 알겠더라. 그리고 왜 사람들이 '연애는 많이 해보는 게 좋다'라고 말했는지도. 


그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가볍게 찔러보란 소리가 아니라 그래야 남을 보는 눈은 물론 스스로를 보는 눈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기 전에는 보통 '이런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하는 식으로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지만, 자신이 어떤 연인이 되겠다는 고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내 연애 스타일이 어떤지도 잘 모른다. 화학반응을 일으킬 외적 요인이 없으니 나를 구성하는 연애 세포가 어떤 형태인지도 알 턱이 없다. 


그러다 연애를 시작하면 하나 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계를 맺을 때는 몰랐지만, 거리가 가까워지고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나도 모르고 있던 모습들이 드러난다. 


내가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이었나? 이렇게 질투가 많았나? 이렇게 참을성이 없었나? 


그러다가 몇 번의 다툼 끝에 익숙해지든, 헤어지든, 아니면 스스로를 갉아내든, 그런 방식을 겪으며 우리는 타협점을 찾는다. 사랑의 힘으로 그런 갈등 따위는 다 박살 내며 직진하든가, 나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든가, 그냥 관계 자체를 포기하든가. 




대학에서 일할 때 학부 졸업생들 지도 교수를 맡았던 까닭에 학생들과 진학과 관련된 상담을 여러 번 했다. 


A 회사와 B 회사 중에 어디에 지원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예전부터 C 회사에 가고 싶었는데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요, D회사에 공고가 떴는데 이런 점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떻게 할까요. 


그런 질문들에 내가 아는 한에서 대답을 해주거나 나중에 따로 알아본 뒤 알려주면서도 마지막에는 비슷한 조언을 하며 끝을 맺었다. 


"Choose a company that can give you what you need now: 지금 네가 필요로 하는 걸 줄 수 있는 회사를 선택해라"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그 과정이 내 인생의 최종 목적지를 정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를 처음 시작할 때 완벽한 결혼 상대자를 찾지 않는 것처럼 첫 직장 역시 완벽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남들 눈에는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회사 역시 내게 좋은 직장은 아니다. 그리고 한번 취업했다고 그 회사에 내 평생을 묻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첫 회사와의 연애에서 우리는 쿨하게 한번 만나보는 사이다. 

너와 내가 통하는 게 있는지 없는지, 내게 너에게 이만큼의 노력과 열정을 퍼부었을 때 너도 나만큼의 성의를 보여줄 수 있는지, 우리는 서로에게 좀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우리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만나게 된 사이. 특히 회사는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 돈은 물론 잠깐의 시간도 쓰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연인이다. 그러니 관계가 성립되었다면 상대방도 내게 뭔가 뽑아 먹을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말이니 그 선택에 지나치게 감사해하며 넙죽 엎드릴 필요도 없다. 


그 사실을 버려진 유기견 같은 취업 준비생에서 직장인으로 변신한 뒤 나는 깨달았다. 


영국 회사에서의 첫 직장 생활. 비자 취득. 


회사는 소규모로 전문 분야에 특화된 컨설팅 회사였고, 내 전공과 아무 상관없었고, 시차가 다른 나라에 있는 고객들과의 프로젝트 회의 때문에 업무는 밤낮없이 몰아쳤고, 하루에 7잔 이상씩 들이부었던 커피와 홍차 덕분에 나는 위염까지 얻었지만, 그 회사는 당시 내가 가장 원하던 두 가지를 줄 수 있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내게 뻗어진 손을 잡았다. 


그 후 나는 내게 필요한 다른 것들을 얻기 위해 직종과 전공을 바꿔 가며 여러 번 더 이직을 했다. 




만약 그때 내가 그 남자와 헤어지지 않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었다면 나는 아마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는 꽤 다른 삶을 살았을 거란 생각을 한다. 당시에 전공과 동시에 교직과정도 이수하고 있었으니 한국에 남았다면 어쩌면 선생님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영국에 나와 독하게 굴러다니던 나는 꽤 시니컬한 인간이 되었다. 


꼭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할 필요도, 연애한다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 말이다. 물론 그 대상이 이제는 회사로 바뀌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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