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Oct 15. 2023

눈감고 시작한 연애의 끝은 정해져 있다

친구는 얼마 전에 두 번째 이혼 소식을 알려왔다. 


나와 동갑인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가족들의 주선 하에 이루어졌다. 영국에 정착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가족들이 모국에서 지켜오던 풍습을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남 부러워울 것 없이 부까지 쌓아 올린 집안은 그들의 두 아들을 모국 출신이지만 그들처럼 영국에 정착한 가문들 중 적당히 수준 맞고 관계도 좋은 집안의 여자 둘과 결혼시켰고, 그다음은 그녀 차례였다. 

그렇게 연애 경험 하나 없이 살아온 그녀에게 이십 대 결혼 적령기가 찾아오자 두 집안은 자신의 아들과 딸의 결혼을 진행시켰다. 


모국의 방식으로 치러진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고 했다. 몇 날 며칠에 걸쳐서 행사가 이루어졌고 그렇게 그녀는 유부녀가 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지 한 달 만에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타인들에 의해 묶여버린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연애 비슷한 감정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고, 자라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 후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반기를 들고 매일 이혼을 시켜달라고 요구했다고 했다. 


그렇게 끊어져버린 첫 번째 관계. 

관계는 벗어났지만, 가족들과 친척들의 시선은 싸늘했고 '문제아'라는 꼬리표는 그녀를 진득하게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녀는 무리하게 두 번째 결혼을 서둘렀다. 그녀가 일하는 자선봉사 단체에서 만나게 된 다른 나라의 이민자, 아니 정확히는 망명 신청자 (asylum seeker). 


그 남자를 알게 된 지 무려 삼 개월 만에 서둘렀던 결혼. 왜 그랬냐는 질문에 그녀는 사랑을 입에 담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피했지만 그간 그녀를 봐온 시간을 통해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주위의 시선들과 또 다른 짝을 그녀 앞에 데려다 놓으려는 가족들의 시도를 막고 싶었겠지. 게다가 망명 신청자이니 영국에는 그들의 결혼에 간섭할 시댁 가족들도 없을 테고. 아예 다른 나라 출신이면서도 종교가 같아 그로 인한 반발을 묻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을 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황은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아무것도 없이 모든 가족을 모국에 남겨두고 영국으로 홀로 떠나온 남편은 새로 얻은 아내의 부를 이용해 그의 가족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그녀와 만든 가족 혹은 처가보다 그렇게 데려온 그의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친구들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느라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육아와 가사를 감당함과 동시에 그녀의 남편과 그의 가족들까지 부양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녀에게 이혼은 어쩌면 당연한 탈출구였다. 

 



취업을 하지 못해 유기견처럼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던 나는 말 그대로 누가 손을 슬쩍 내미는 시늉만 해도 꼬리를 흔들어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어떤 회사인지, 그 업무가 뭔지, 계약 조건이 뭔지, 눈앞이 깜깜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뛰어든 어둠 속은 꽤나 암담하고 괴로웠다. 


영국에서 연구원 (Research associate)의 자리는 보통 프로젝트 기간에 따라 2년에서 5년 정도 계약직으로 진행되는데, 아직 연구원을 고용할 funding confirmation (연구 자금 확보의 최종 결정)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곧 자리가 생길 테니 '임시'로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내 전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박사 과정을 하는 동안 쌓인 짬을 이용해 열심히 자료를 조사하고 프로젝트 제안서와 보고서도 만들어냈다. 돈을 주지도 않았고, 그 자리가 언제 난다는 확답이나 자세한 일정도 듣지 못했고, 이메일처럼 미래를 약속해 주는 증거도 없는데 그 사람의 말만 덥석 믿고 노동력을 쏟아부은 거다. 


그 희망 회로는 몇 주일 후 결과물과 함께 그동안 쌓인 의심과 불안을 정제된 물음으로 그 사람 앞에 내민 뒤 박살 났다. 그 사람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그런 걸 약속한 적이 없다."


학회 때 내가 발표한 논문을 인상 깊게 봤다는 연락이 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설레는데 자신의 대학에 이런 교수 자리가 나는데 지원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다. 앞뒤 잴 것 없이 나는 'YES'라고 열정 가득 담긴 대문자로 쓴 대답을 했다. 


사전면담을 하러 오라는 말에 편도로만 세사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택시까지 타고서 찾아갔다. 그렇게 30분 정도 넘는 면담을 끝낸 뒤 그 과정을 되풀이해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그 후 면접을 포함해 3번 넘게 더 그 길을 왕복했다.

교통비와 시간이 소비되었지만 투자라고 생각했다. 창밖을 보며 여기에 취업하면 차라리 대학 내 기숙사를 알아보는 게 낫겠다, 아니면 이번에 차를 장만하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다 못해 학과 사무실로도 연락을 했지만 그 사람과 닿지 못했다. 그 사람과 연락하는 걸 포기하고 일단 면접의 결과부터 알려달라는 연락을 학과 사무실에 하자 '불합격' 통지가 날아왔다. 허탈해서 이유라도 알려달라고 하자, 그건 면접관이 알려 줄 수 있다고 했고, 그 사람의 동료는 내 문의 이메일에 그 사람과 이야기하라는 짤막한 답을 보내왔다. 그렇게 기회라고 생각했던 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국제 기업 면접장에서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말에 눈에 띄게 실망하며 '한국인은 지금 필요 없다'는 거절의 말을 듣기도 했고, investment bank (투자 은행) case study (사례 연구) 시험을 보러 간 자리에서는 '케임브리지 졸업생들은 전공 관련 없이 다들 금융, 투자 업계로 빠진다, 그럴 거면 왜 전공을 선택해서 간 거냐, 대학 이름을 팔아서 한몫 챙기려는 게 아니냐'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문서상으로 전해받는 불합격 통보가 내게 '실패'라는 스티커를 붙인다면, 저런 경험들은 칼날 박힌 푯말이었다. '실패'라는 명패를 다는 것도 모자라 내게 깊숙한 상처까지 남기는. 


나도 살아있는 생명체이기에 저런 경험들이 반복되자 자연스레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강제로 눈이 떠지고, 내게 뻗어져 오는 손을 환영하기 이전에 의심부터 하고 보게 되었다. 

더 이상 상대방의 일방적인 호의나 관심을 기다리기보다 내가 필요한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상황에 휩쓸리고, 방치되고 기다리기만 했던 유기견의 입장에서 나도 선택하기로 결정한 거다. 


이전 02화 남들도 다하는 연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