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Jan 10. 2024

잔소리 안 하려고 이 악물고 참는 중

나는 나름 일처리가 괜찮은 직장인이다. 

자기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승진을 하고 자리를 올라갈 때마다 쌓이는 책임에 대한 중압감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휘청거리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내보일 수는 없으니까. 팀이 얼마나 크든 작든 간에 조직의 수장이 확신 없는 모습을 보이면 조직 구성원들도 분열된다. 

수장도 지지 못하는 책임을 혹시 자신이 지게 될까 봐 두려워 소극적 태도를 보이거나, 회피하거나 불신하거나, 아니면 불만을 가지고 탈출 혹은 반란을 꿈꾸거나. 


그뿐 아니라 배고프다고 울부짖지 않으면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든 영국의 직장 문화 때문에 도리어 스스로를 믿어야만 하게 된 것도 있다. 

한국에서라면 잘난 척한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성취를 드러내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혹은 그걸 당연한 거라고 여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일처리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도 생기고, 나만의 원칙도 갖게 된다. 특히 책임을 지기 시작하는 입장에 오래 있다 보면 샌드위치 안에 발라진 버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안에 들어오는 온갖 재료들이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따라 인기 상품이 될 수도 있고 바로 폐기 처분될 수도 있으니까.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휴가 간 팀원들의 업무를 야간근무까지 해서 가능한 많이 처리해 놓고, 크리스마스 후에 돌아올 팀원들을 위해 처리된 일들과 그들이 돌아왔을 때 처리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전체 메일을 돌린 뒤 10일 동안 휴가를 다녀왔다. 


돌아와서 이메일을 확인하는데... 반나절 만에 로그아웃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N은 일을 제 입맛대로 골라 처리하는 버릇이 있다. 10개의 업무가 있다면 그중 마음에 들고 자신이 자신 있는 것만 골라 일을 진행시키고, 나머지 일들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옆으로 팽개쳐 놓는 거다. 

그리고 그중에는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교육 과정도 있다. 대충 30분 정도만 투자하면 되는 일인데 마감일이 길다 보니 보통 잊고 있다가 마감일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감일이 지나고 나면 2-3일 간격으로 reminder email이 당사자와 당사자의 상사에게 보내지는데, 10일 동안 3통의 이메일이 와있는 거다.


이때쯤 되면 사람들 다 휴가 가 있는 동안 무슨 큰일이 터진 것도 아닌데 왜 30분짜리 교육 영상하나 보지 않아서 이런 메일이 몇 통이나 날아오게 만드나. 자기 메일 확인도 안 하나? 이 메일이 내게도 날아오는 걸 모르나? 등등 온갖 생각이 다 드는 거다. 


J는 의욕은 넘치는데 꼼꼼하지 못해서 일처리가 허술한 편이다. 샴페인을 일찍 따는 타입이라고 할까. 

아직 일이 다 마무리된 게 아닌데 금방 들뜨고 프로젝트의 한 단계가 끝났을 뿐인데 얼른 손을 털고 일어서고 싶어 한다. 


그랬던 까닭에 J가 휴가 가 있던 12월의 중순을 나는 그가 제대로 닫지 않아 내용물이 반쯤 새어 어질러진 프로젝트를 대신 마무리 지어야 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도 있었던 까닭에 나는 내가 휴가 가기 바로 전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그와 통화를 하면서 그 일에 대한 주의를 주고 이런저런 업무에 대한 지시 사항을 자세히 남기고 갔는데... 


돌아왔더니 뭐 보이는 게 없는 거다. 그와 관련된 메일도 없고, 일의 진행 사항을 알리는 메일도 없고, 보고서도 없다. 

보다 못해 메신저를 통해 일은 어떻게 되었냐 하고 물으니, 'nothing much happened'란다. 

그 대답에 살짝 혈압이 오르려는 걸 꾹 참고 업무 진행 사항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를 올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메신저로 듬성듬성 메시지를 보낸다. 

아니, 정리를 하라고! 한눈에 진행 사항을 알 수 있게 요약해서 보내라고! 


F에게는 다른 프로젝트 보고서를 업데이트하라고 이미 12월 초부터 얘기를 해뒀다. 그런데도 진전이 없어서 휴가 전에 2시간 동안 미팅을 하면서 세세하게 업무 지시를 해놓고 갔는데.. 

돌아왔더니 보고서 업데이트 대신 "I really don't know how to do it. Can we go through it again please?" 하는 메시지와 함께 meeting invite가 날아와 있었다. 

.... 레퍼런스도 다 모아다가 폴더에 넣어놨고, 이전 샘플도 다 모아놨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다 문서로 저장해 줬는데.... 못하겠다고? 그걸 이제야 말한다고? 


당장 우르르 잔소리의 폭탄을 그들에게 던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새해 들어 아직 얼굴 보고 'Happy New Year'도 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휴가에서 복귀한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들은 내가 돌아와서 밀린 업무를 처리할 때까지 보고를 늦추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지. 

내가 오기 바로 전에 training을 끝냈을 수도 있고, 업무는 내가 cc 되지 않았다 뿐이지 뒤에서 진행되었을지도 모르고, 미팅은 하면 되지. 해서 다시 문제가 뭔지 알아보면 되겠지. 


이럴 때마다 내가 몹쓸 상사인가 싶기도 하고, 내 참을성이 부족한가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새해를 맞아 몰아치는 임원회의에 참가하다 보면 다시 잔소리하고픈 충동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왜냐면 이미 차는 굴러가고 있으니까. 내가 맡은 분야가 박살 나서 차 운영에 문제를 일으키도록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우리는 움직여야 되니까. 


그런 까닭에 나는 어떻게 하면 잔소리를 잔소리로 들리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어떤 타이밍에 적절하게 던져야 할지 고민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 머릿속이 궁금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