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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Jan 17. 2024

오랜만의 연락이 설레지만은 않는 나이

둘째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체리필터의 'Happy Day'라는 곡을 들으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노래가 끊기며 전화가 울렸다. 

10년 넘게 연락 한번 하지 않고, 그저 카톡에 저장되어 있기만 했던 예전 남자친구 H였다.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넘은 시간. 

약간은 풀어진 말투. 

처음에는 술김에 잘못 걸었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는 내 안부를 물어왔다. 

잘 지내냐, 건강하지? 

등등. 


가벼운 인사말들이었고, 농담이 오고 갔지만, 중간중간 전파방해라도 받는 듯 침묵이 깔렸다가 사라졌다. 

그 잠깐의 정적이 찾아올 때마다 내 머릿속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많이 취한 건가. 무슨 일이 있나. 

그런들 이렇게 내게 전화한다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 끝에 나는 '그래, 그럼 이만..'이란 말로 통화를 종료시키려 했지만, 그 마지막에 그가 말했다. 


"K 기억나?"


물론 기억했다. 

- 저 XX 씨 정말 많이 미워했는데, 이젠 원망하지 않을게요. 

그와 내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녀가 했던 말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가 나와 바람을 피우다가 헤어진 것도 아닌데, 그때 나는 그런 말을 듣고 내가 미안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침묵했었다. 


"K, 암이라더라."


그제야 나는 왜 그가 내게 전화했는지 알았다. 왜 그가 술에 취해 있는지도. 왜 그가 굳이 내게 전화를 했어야 했는지도. 


동시에 그의 연락은 나를 20년 전 겨울로 돌아가게 했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첫사랑 S와 재회했던 그날 말이다. 


몇 년 동안의 공백이 무색하게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떠들었고, 웃었고, 그때 너는 정말 재수 없었다며 서로에게 투덜거렸고, 네 지금 남자/여자 친구가 불쌍하다며 서로를 놀렸다.

만남의 끝이 다가왔을 때 나는 우리가 어쩌면 이제라도 진짜 친구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내 말에 어설프게 웃던 그가 말했다. 


나 사실 암이야,라고. 

이미 수술을 여러 번 했지만 더 이상은 안될 것 같다고. 


그 후 반년도 되지 않아 그는 중환자실도 옮겨졌고, 나는 이미 전이가 진행되어 아무것도 눈에 담지 못한 채 호흡기를 통해 유지되고 있는 그를 마지막으로 본 뒤, 며칠 후 영안실에서 그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가족도 아니고, 여자친구도 아니며, 친구로 규정되지도 않는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의 친구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가 중환자실에 갔다는 소식도 몰랐을 테고, 그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마지막조차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에게 뭔가를 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 기간 동안 나는 몇 번이고 후회했다. 

그에게 했던 모진 말들과 행동을. 내가 그에게 남긴 상처가 기어코 꽈리를 틀어 암세포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말갛게 웃고, 뭐든 내게 주고 싶어 거북이 천 마리를 접어 선물해 주던 그 순한 남자아이가 왜 고작 20대도 몇 해 누리지 못하고 이렇게 죽어야 했는가. 

그를 망친 건 내가 아닐까. 그의 첫 연애 상대가 좀 더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나처럼 뒤틀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H가 K의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는 모른다. 

K는 내게 H의 전 여자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가 그와의 이별 이후 꽤 오랫동안 힘들어했단 걸 안다. 굳이 내 연락처까지 알아내서 연락을 할 만큼. 


20대에는 그저 연애 이야기였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또 생각한다. 

그때 우리에게 사랑이었던 건 누군가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던 걸까. 


40대. 

이제는 더 이상 오랜만의 연락이 설레지만은 않는다. 

솔직히 덜컥 겁이 날 때가 더 많다. 


20대에는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을 때 연락을 더 많이 했던 거 같은데, 이제 40대 우리에게는 '특별한 일'이 '좋은 일'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아직 자녀들로 인한 좋은 소식을 전할 나이도 아니니, 지금 누군가 오랜만에 연락을 하면, 대체로 부모, 혹은 조부모의 상 (죽음), 이혼, 실업, 혹은 본인의 건강 문제 등등 일 때가 더 많으니까.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면 좋았던 시절의 추억보다는 후회가 더 많이 밀려온다. 

그래봤자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니 뒤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그래도 이런 날에는 기도하게 된다. 


제발. 내가 과거에 알게 모르게 상처 입혔던 그들에게 그 상처가 제발 크게 남지 않았기를. 

차라리 나와의 기억 자체를 잊어버렸기를. 

그리고. 당신에게 상처를 남겨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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