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 슬슬 퇴근 (로그아웃)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읽자마자 퇴근시간 마저 잠시 잊게 하는, 백회혈까지 뜨거운 열이 올라오게 하는 그런 이메일.
잠시 눈을 감고 열을 갈무리 한 뒤 다시 차근히 메일을 읽어봤다.
혹시라도 퇴근을 기다리며 하루의 일과로 과부하된 내 눈이 내 뇌에다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길 바랐지만, 역시 세 번을 정독해 봐도 이해는커녕 열기에 분노까지 차올랐다.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보고가 내게 들어왔었고, 이미 그에 대한 대처 방안에 대해 몇 차례 안팎으로 회의가 있었다.
3개의 파티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그중 파티 두 곳의 대립이 첨예해서 일은 해결되지 않고 벌써 몇 주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둘을 중재하느라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다 진이 빠졌고, 꽤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대립하고 있는 A의 수장이 대뜸 메일을 보내서, 나한테 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왜 B에게 더 강하게 나가지 않느냐고, 그게 내 할 일이 아니냐는 소리를 하는 거다.
안 그래도 A와 B 사이에 끼어서 갈려나가는 팀원들 보고 있는 것도 짜증 났는데 지금 나한테 뭐?
지금 누가 뒤에서 느긋하게 발 뻗고 앉아 팝콘이라도 먹고 있는 줄 아나?
진작에 제시하는 해결책들도 싫다고 안된다고 족족들이 튕겨내서 중간에 낀 우리만 고생하고 있는데, 뭐?
Reply 버튼을 누르고 글을 써 내려가는 손이 바빠졌다. 쓰다가 문장 몇 개를 얼마나 지웠는지 모르겠다. 아직 이성이 마비되지 않은 훌륭한 직장인의 자세였다. 열받는다고 폭탄을 던질 수는 없으니까.
공격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어야 하지만 칼날이 심어져 있다는 걸 드러내야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수정 끝에 바로 보내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식힌 뒤 다시 메일을 읽어본 뒤에야 보냄 버튼을 눌렀다.
"사회생활을 잘해야 한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말이다.
영국의 직장생활에서도 이 말은 통용된다.
영국인의 특성상 사람들은 늘 적정한 선을 유지하면서 예의를 지키고, small talk를 통해 다들 사교적인 분위기를 풍겨 내기 때문에, 적어도 직장에서 대부분의 상호 작용은 무난하게 흘러간다.
물론 개중에도 사적으로도 친한 관계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영국에는 일 년에 몇 번을 제외하면 단체 회식이라는 개념도 잘 없고, 그런 게 있어도 참여 여부에 강제적인 요소가 없고, 일적인 것 외에서의 인성을 딱히 문제 삼지도 않기 때문에 개인의 사교성이 직장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이렇게 다들 직장 생활할 정도의 기본 사회생활 옵션은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누가 더 친절하다거나, 유쾌하다거나, 재밌다거나, 착하다거나, 그런 건 노트 표지 색깔이 빨갛고 파랗다는 정도의 차이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젠틀하고 예의 바른 영국이지만, 적어도 내 경험에 따르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를 드러낼 때 드러내 줘야 한다. 평소에는 고운 말, 예쁜 말만 쓰다가도, "bxxx sxxt"이란 말을 태연히 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의 개수작에 같이 웃으며 맞받아쳐주다가도 "I don't think so"하고 칼같이 잘라줘야 한다.
안 그러면 이것들은 선을 모른다. 자신이 던지는 무례함의 무게를 모르는 거다. 자기도 맞아봐야 알지.
그리고 한번 참고 넘어간다? 이번만 봐주는 거다,라고 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기고 봐준다?
그럼 상대방은 딱 그만큼 선을 옮긴다. 다음부터는 그게 선 넘는 행동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는 거다.
Set a precedent = 선례를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직장 생활에서는 선을 넘는다 싶으면 그걸 상대방한테 인식시켜 줘야 한다.
아무리 이번에는 참고 넘어간다고 해도, 상대방이 그걸 알도록 하는 거다.
"I understand that it's urgent and I can help you out this time, but I'd appreciate if you let me know at least 2 days in advance" (급하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도와주겠는데, 다음부터는 적어도 이틀 전에 알려줘) 뭐 이런 식으로.
선을 세게 넘는다? 그럼 칼을 정성껏 이메일과 말과 표정에 박아 넣어줘야 한다.
어투는 상냥하지만 표현은 단호하게.
표정은 부드럽지만 눈에는 살기를 담아.
이 참에 쓸만한 표현을 나눠보자.
"I don't think so/ I don't agree"
"I don't think your comment is fair/ reasonable"
"That's not acceptable"
"I would have liked if you..." (차라리 네가 이렇게 했다면 나았을 텐데)
"That was insensitive/ offensive/ unreasonable/ unfair/ unacceptable...."
참고로 여기서 중요한 건 주체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 일/상황에만 한정 짓는 것도 중요하다.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네'가 싫다,라는 게 아니라, '네가 한 그 행동/말/태도'가 싫다,라는 거니까.
그래야 또 다음에 만날 때 아무 일 없었던 척 웃으며 사회생활을 계속하지.
참고로, 만약 여기서 "I don't like the way you do/say, you always do that, you never care, you don't...' 이런 식으로 개인을 공격하면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파탄 나는 건 물론이고, 당신의 위치나 직급에 따라 HR에 불려 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