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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31. 2024

직장인은 이를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저녁 시간. 슬슬 퇴근 (로그아웃)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읽자마자 퇴근시간 마저 잠시 잊게 하는, 백회혈까지 뜨거운 열이 올라오게 하는 그런 이메일. 


잠시 눈을 감고 열을 갈무리 한 뒤 다시 차근히 메일을 읽어봤다. 

혹시라도 퇴근을 기다리며 하루의 일과로 과부하된 내 눈이 내 뇌에다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길 바랐지만, 역시 세 번을 정독해 봐도 이해는커녕 열기에 분노까지 차올랐다.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보고가 내게 들어왔었고, 이미 그에 대한 대처 방안에 대해 몇 차례 안팎으로 회의가 있었다. 

3개의 파티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그중 파티 곳의 대립이 첨예해서 일은 해결되지 않고 벌써 몇 주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둘을 중재하느라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다 진이 빠졌고, 꽤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대립하고 있는 A의 수장이 대뜸 메일을 보내서, 나한테 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왜 B에게 더 강하게 나가지 않느냐고, 그게 내 할 일이 아니냐는 소리를 하는 거다. 


안 그래도 A와 B 사이에 끼어서 갈려나가는 팀원들 보고 있는 것도 짜증 났는데 지금 나한테 뭐? 

지금 누가 뒤에서 느긋하게 발 뻗고 앉아 팝콘이라도 먹고 있는 줄 아나?

진작에 제시하는 해결책들도 싫다고 안된다고 족족들이 튕겨내서 중간에 낀 우리만 고생하고 있는데, 뭐?


Reply 버튼을 누르고 글을 써 내려가는 손이 바빠졌다. 쓰다가 문장 몇 개를 얼마나 지웠는지 모르겠다. 아직 이성이 마비되지 않은 훌륭한 직장인의 자세였다. 열받는다고 폭탄을 던질 수는 없으니까. 

공격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어야 하지만 칼날이 심어져 있다는 걸 드러내야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수정 끝에 바로 보내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식힌 뒤 다시 메일을 읽어본 뒤에야 보냄 버튼을 눌렀다. 




"사회생활을 잘해야 한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말이다. 

영국의 직장생활에서도 이 말은 통용된다. 


영국인의 특성상 사람들은 늘 적정한 선을 유지하면서 예의를 지키고, small talk를 통해 다들 사교적인 분위기를 풍겨 내기 때문에, 적어도 직장에서 대부분의 상호 작용은 무난하게 흘러간다. 

물론 개중에도 사적으로도 친한 관계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영국에는 일 년에 몇 번을 제외하면 단체 회식이라는 개념도 잘 없고, 그런 게 있어도 참여 여부에 강제적인 요소가 없고, 일적인 것 외에서의 인성을 딱히 문제 삼지도 않기 때문에 개인의 사교성이 직장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이렇게 다들 직장 생활할 정도의 기본 사회생활 옵션은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누가 더 친절하다거나, 유쾌하다거나, 재밌다거나, 착하다거나, 그런 건 노트 표지 색깔이 빨갛고 파랗다는 정도의 차이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젠틀하고 예의 바른 영국이지만, 적어도 내 경험에 따르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를 드러낼 때 드러내 줘야 한다. 평소에는 고운 말, 예쁜 말만 쓰다가도, "bxxx sxxt"이란 말을 태연히 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의 개수작에 같이 웃으며 맞받아쳐주다가도 "I don't think so"하고 칼같이 잘라줘야 한다. 


안 그러면 이것들은 선을 모른다. 자신이 던지는 무례함의 무게를 모르는 거다. 자기도 맞아봐야 알지. 

그리고 한번 참고 넘어간다? 이번만 봐주는 거다,라고 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기고 봐준다? 

그럼 상대방은 딱 그만큼 선을 옮긴다. 다음부터는 그게 선 넘는 행동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는 거다. 

Set a precedent = 선례를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직장 생활에서는 선을 넘는다 싶으면 그걸 상대방한테 인식시켜 줘야 한다. 

아무리 이번에는 참고 넘어간다고 해도, 상대방이 그걸 알도록 하는 거다. 

"I understand that it's urgent and I can help you out this time, but I'd appreciate if you let me know at least 2 days in advance" (급하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도와주겠는데, 다음부터는 적어도 이틀 전에 알려줘) 뭐 이런 식으로. 


선을 세게 넘는다? 그럼 칼을 정성껏 이메일과 말과 표정에 박아 넣어줘야 한다. 

어투는 상냥하지만 표현은 단호하게. 

표정은 부드럽지만 눈에는 살기를 담아. 


이 참에 쓸만한 표현을 나눠보자.  


"I don't think so/ I don't agree"

"I don't think your comment is fair/ reasonable"

"That's not acceptable"

"I would have liked if you..." (차라리 네가 이렇게 했다면 나았을 텐데) 

"That was insensitive/ offensive/ unreasonable/ unfair/ unacceptable...." 


참고로 여기서 중요한 건 주체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 일/상황에만 한정 짓는 것도 중요하다.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네'가 싫다,라는 게 아니라, '네가 한 그 행동/말/태도'가 싫다,라는 거니까. 


그래야 또 다음에 만날 때 아무 일 없었던 척 웃으며 사회생활을 계속하지. 


참고로, 만약 여기서 "I don't like the way you do/say, you always do that, you never care, you don't...' 이런 식으로 개인을 공격하면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파탄 나는 물론이고, 당신의 위치나 직급에 따라 HR에 불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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