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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Nov 24. 2024

국민성을 대표하는 영국 중산층

“Keep Calm and Carry On”


아마도 많이 들어본 말일 거다. 이걸 패러디 한 슬로건도 꽤 많은 편이니 말이다 (가장 흔한 건 Keep Calm and Drink xx, 혹은 Keep Calm and Eat xx 등으로 카페나 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슬로건은 원래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정부에서 발행한 포스터 시리즈 3개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Keep Calm and Carry On - The Compromise behind the Slogan"). 


다른 두 슬로건은 “Your Courage, Your Cheerfulness, Your Resolution: Will Bring Us Victory”, “Freedom in Peril; Defend it with all Your Might”. 대신 다른 두 포스터와 달리 이 슬로건은 정식으로 발행된 적은 없지만 1939년 처음 아이디어가 도입된 이후 75년이 지나서야 갑자기 유행을 타게 된 슬로건이라고 한다.  


패러디가 넘쳐날 정도로 잘 알려진 저 슬로건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저게 영국의 국민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에도 과하게 반응하지 않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절제된 마음가짐으로 다음 순간을 살아가는 자세. 


물론 평상시에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국민성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잘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2005년 7월 7일 런던에서 발생한 테러 사태 때가 그랬다.

 

그때 나는 런던으로 내려가기 위해 이른 아침 케임브리지 버스 스테이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런던으로 가는 모든 버스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소릴 들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럼 기차표를 알아봐야 하나 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걸어가다가 나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아침 출근 시간에 런던 중심부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테러 사건. 

 

충격적이었다. 킹스크로스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테러였기에, 만약 내가 욕심을 부려서 더 일찍 런던에 내려가려고 기차를 탔다면 나 역시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소름 끼치기도 했다. 


처음의 충격이 지나간 뒤, 내가 속으로 적잖이 놀란 건 바로 영국인들의 태도였다. 

모든 대중교통이 마비된 상황. 뉴스에서는 일찍 퇴근한 사람들이 묵묵히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런던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했을 때도, 그들은 다들 나는 괜찮다고, 슬픈 일이라고,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3시간이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친구에게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불평하지 않았고, 슬퍼했지만 흥분하지 않았고, 패닉 상태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고요한 애도의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가 이렇게 말했다 (Full Text: Tony Blair's Statement to MPs)


“(…) We are united in our determination that our country will not be defeated by such terror but will defeat it and emerge from this horror with our values, our way of life, our tolerance and respect for others, undiminished. (..)

And for Londoners themselves, their stoicism, resilience, and sheer undaunted spirit were an inspiration and an example. (…)” 


테러라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만의 가치와 삶의 방식, 인내와 다른 이를 향한 존중을 유지함으로 이 상황을 이겨내겠다, 그런 내용 뒤에 나오는 런던에 살고 있는 이들을 향한 메시지에 위의 슬로건과 일맥상통하는 단어가 나온다.  


Stoicism 

/the quality of experiencing pain or trouble without complaining or showing your emotions/ (Cambridge dictionary) 

/the endurance of pain or hardship without the display of feelings and without complain/ (dictionary.com)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감정의 표현 없이 견디는 것. 한국어 번역으로는 금욕주의, 혹은 극기주의라는 단어로 나오는데, 이건 아무래도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의 스토아학파의 사상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어에서 누가 stoic이라고 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어도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감내하고 이겨내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이건 영국인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많이 쓰이는 단어 중 하나다. 다른 단어로는 ‘reserved’, repressed, resilient, self-controlled, unemotional, 등이 있다. 


이런 성향은 굳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How are you?”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대부분, “ok/ good/ not bad”로 대충 통일되어 있는 것과, 만약 상대방이 (그것도 친한 친구나 가족이 아닌 이상) 부정적인 대답을 하면 당황하는 것. 

격한 감정표현 (여기서 격하다는 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거나, 정색했다는 정도로, 한국인의 분노 수치에 비하면 세발의 피 정도다)을 했다고 스스로 판단했다면 나중에 후회하며 사과하는 것 (특히 직장 생활에서 많이 보인다).

친하지도 않은 누군가의 고민 상담에 어색하게 굳어버리는 것.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참고 넘어가는 것 (예를 들어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아주 맛이 없어도 종업원이 와서 ‘Is everything ok?’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Yes, all good, thank you’하고 웃으며 대답한다. 그 뒤 종업원이 사라지고 나면 싸늘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욕을 할지라도) 


이런 태도 때문에 영국인에게는 다른 수식어가 붇기도 한다. ‘Stiff upper lip (뻣뻣한 윗입술 - 꽉 다문 입술)’, ‘two faced (이중적인, 위선적인)’, 속을 알 수 없다, 친해지기 어렵다, 등등. 


그런데 이 기사 "The truth about British stoicism"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The stiff upper lip was historically an upper class, public school, university and then military concept”


즉, 원래는 상류층의 특징이었던 게 전쟁을 통해 사회 전반에 깔린 음울한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소리다. 

그러면서 이 기사는 많은 영국인들이 그걸 한물 간 소리라고 취급한다며, 이제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감정표현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끝을 맺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의견에 절반정도만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 감정표현이란 게 여전히 영국에서는 예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많은 관공서에는 아래와 비슷한 문구가 꼭 붙어있다. 


"Zero tolerance: Swearing, threats, rudeness or any act of violence will not be tolerated. Anyone giving verbal abuse to members of staff will be asked to leave immediately. Think before you act"


여기서 말하는 금지된 행동이나 말에는 욕이나 폭력적인 행동도 포함되지만, 목소리를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것, 소리 지르는 것, 비아냥 거리거나 비꼬는 것, 등 과한 감정이 드러나는 모든 것이 대부분 포함된다. 


그뿐이랴, 레스토랑과 같은 곳에서도 과하게 크게 웃거나 목소리를 높이면 다들 힐끔힐끔 쳐다본다. 음식점이 시끌시끌하고 떠들썩 한건 보통 한국이나 스페인에서 많이 볼 수 있지, 영국에서는 주말 저녁의 클럽이나 바 같은 곳이 아니라면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경우에도 보통 노랫소리가 커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진 경우다). 


이런 문화에 반(反)해서 개인의 감정 표현에 솔직한 이들은 z 세대 (generation z)라 불리는 젊은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역시 중산층 이상의 자식들이다), 예술 관련 종사자들, 그리고 'uneducated people' (교육을 받지 못했다기보다 보통 못 배워먹었다는 말로, 한국말과 비슷하게 쓰인다 -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언행이 거칠고, 무례하며 예절을 모른다, 등).

 



사실 무례한 사람이나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고 사는 자유로운 영혼들이야 어느 문화권에서든, 어느 사회에서든 있지만, 영국이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이게 개인으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급 간의 구분이 아직도 뚜렷한 사회. 


같은 영어라도 말투가 다르고, 쓰는 단어가 다르다. 이건 지역별 사투리라기보다 계급별 사투리라고 쓰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다. 

사람과 만나고 교류하는 방식과 즐기는 문화생활도 다르고, 생활 반경도 다르다. 


다른 계급과 뚜렷이 구별되어 자신들만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소수의 상류층이 존재하며, 반면에 오랫동안 고인 물처럼 그 지역에 모여 사는 워킹클래스, 혹은 빈민층도 존재한다. 


이들은 감정의 표현방식도, 대화하는 방식도 다르기에 서로 거의 교류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들이 사는 주거지는 물론, 타운 혹은 지역 전체가 어떤 클래스의 수준으로 낙인찍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낙인찍힌 곳은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발걸음 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계급의 고착화가 진행된다. 


개인적의 경험으로는 신랄하고 무례한 이들은 못 배워먹었다고 불리는 하층계급의 출신이거나 아니면 상류층 출신이었다. 한쪽은 생각 없이 그냥 내뱉는 거고 (악의 없이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일 때도 있다), 다른 한쪽은 알면서도 자신의 우위를 알기에 내뱉는다는 게 맞다 (악의를 숨길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영국인의 'stoicism'이 유지되는 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의 중산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예의를 중시해서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say, thank you, please, sorry'를 주입시키고, 큰소리를 내지 말라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하며,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oh well'하고 넘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참고로 심각하거나 안 좋은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반응에 따라 중산층을 알아볼 수도 있다. 


“fxxxing hell” 등의 욕설로 추임새가 나오거나 대화가 마무리된다면 중산층은 아니다. 


중산층들이 이런 상황을 마무리 짓는 패턴은 의외로 단순하다. 


“Tea?”

“Yes, please.”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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