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의 꿈

by Soo

지난밤에 꿈을 꾸었다. 낯익은 사람들. 낯익은 곳.

나와 내 동생이 초등학생일 때,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은 우리를 외갓집에 맡겼다.

외갓집에 세 들어 살던 부부에게는 우리와 나이가 똑같은 남매가 있었다.

여름방학에는 넷이서 땀을 흠뻑 흘리며 곤충채집을 하러 다니거나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노느라 새카맣게 탔다. 겨울방학에는 눈이라도 올라치면 있는 눈 없는 눈을 끌어다 눈사람도 만들고 손이 얼 때까지 눈싸움도 했다.

집에서 놀 때는 3살 어린 남동생들을 학생으로, 누나인 우리는 선생님이 되어 학교놀이를 하거나 편을 짜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나는 왠지 서울에서 온 새침한 여자애 흉내를 내고 싶었고 사시사철 촌티가 흐르는 그 남매 앞에서 이유 없이 우쭐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건대, 그곳에 그 남매들이 없었더라면 방학마다 군소리 없이 외갓집에 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남매의 엄마는 가정주부였고, 아빠는 택시운전을 했다. 그러나 그 집 엄마는 집에 거의 없었고 아빠는 일이 없으면 집에서 잠을 자거나 누워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일수가방을 들고 2대 8 가르마를 곱게 하고서는 우리가 계단에서 놀고 있거나 할 때 집을 나섰다.

외갓집은 언제나 환하고 반짝거렸다. 깨끗한 외할머니의 취향은 집을 그렇게 단정하게 만들었다. 쾌적한 환경과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간식 같은 것들이 그 남매도 좋았는지 자주 와서 놀고 싶어 했다.

가끔 남매가 자기들 집에 재밌는 것이 있다며 보러 가자고 해서 가보면 같은 건물인데도 늘 집이 어두웠다. 그리고 지저분했다. 발 디딜 틈이 없이 바닥에 뭔가가 흘려져 있어서 깨금발을 딛고 다녔다.

남매의 엄마는 화를 자주 냈다. 말을 안 듣는 남매에게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남편에게도 그러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온 동네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남매는 엄마에게 자주 맞았고 특히 아들은 그럴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곤 했다.

그 집에서는 부부싸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서, 초저녁 이른 잠자리에 들으시려는 외할머니, 할아버지가 곤란해하시기도 했다.

그 집의 문 앞에 아줌마들이 떼로 몰려와 그녀와 싸우기도 했다. 그러는 통에 외할머니가 말리러 가신 적이 있다.

외갓집의 넓은 거실 한편에서 우리 남매가 그림을 그리고 있던 어느 날은 그녀가 외할머니를 울면서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외할머니는 고쟁이에서 얼마를 꺼내 그녀 손에 쥐어주고 보냈다.

그 집에 한 때는 아주 어린 아기가 맡겨졌다. 기저귀를 하고 있는 아기였는데 그녀가 아기를 돌보는 시간보다 남매가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언제 닦았는지 모를 젖병에 우유를 주었다. 가끔 우리가 먹는 과자도 입에 넣어주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해가 안 되어서 ㅡ이 아기 엄마는 왜 여기에 아기를 맡겨?ㅡ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대답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별로 납득은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외갓집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그 남매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간혹 생각이 난다.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30년이 지났는데 이름이 기억나는 것은 그 집 남매의 성이 아주 희귀한 것이었기에 가능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를 때 나는 꼭 그 남매의 엄마가 생각이 난다. 목청껏, 삶에 찌들어 내뱉는 사자후 비슷한 것을 지르고 나서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웽하니 맴도는 것이다.


그녀의 나이가 지금의 나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 당시를 살았던 모습이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때로 그녀처럼 삶이 버겁고 고달프다.


그러나 지금 나의 삶이 그렇듯, 그때 어린 내 눈에 그들의 삶은 꼭 비극만은 아니었다. 남매는 세상에 둘뿐인 것처럼 서로를 아꼈고 부부에게는 부대낄 서로가 있었다. 그들은 웃고 울고 있었다. 그것이 짧은 시간 내 눈에 비친 그 가족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꿈에서 그들을 만났다.
남매와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다 남매의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셨고 그분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남매의 엄마는 우리를 너무나도 반가워하며 외할머니, 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외할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신수가 훤해진 남매의 아빠가 뒤이어 들어와서 나를 알아보고는 으레 근엄한 어조로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해주고 좋은 것을 들려 보내라고 했다.

나는 어젯밤 꿈에서, 얼굴 생김새조차 희미한 그들을 만났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억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기억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그들과 함께.

지금의 우리처럼 젊었던 남매의 부모는 아이들을 키워내고 삶을 살아내느라 고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이 들었을 지금, 지난밤의 꿈에서처럼 그들이 편안한 모습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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