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추억

by Soo

어릴 적 명절은 쉴틈이 없는 여정이었다.

철도청에서 일하는 이모 덕에 그 구하기 힘들다는 명절 기차표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고 ktx가 없던 그 시절 기차를 몇 시간 씩 타고 시골에 갔다.

친가는 전라도 고창이었다. 고창에 가려면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정읍역에 가서 택시를 타고 들어갔다.

한 번은 아빠가 추석에 직접 운전하셔서 가 본 적이 있는데 10시간 이상을 운전하다 지치신 아빠 때문에 터미널에 있는 여관에서 쉬었다가 간 적도 있다.

시루 같은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먹을 것을 가득 실은 카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부모님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하나만, 하나만 하면서 안달이 났다가 잠이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늦은 오후 도착한 정읍역에서 택시를 타고 한 시간 여를 가는 길에 나와 내 동생은 꼭 멀미를 했다. 한 사람이 시작하면 다른 한 사람이 따라하는 식이었다. 엉망이 된 택시로 엄마와 아빠를 당황하게 만들고 택시비보다 훨씬 더 많은 세탁비를 지불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쌩쌩 달리는 택시에서 가는 길 내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고 갔다. 살이 에일 듯하게 차가웠지만 그런대로 멀미는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고창의 시골집 앞에 내리면 사시사철 소똥 냄새가 났고 나무로 된 대문을 끼익 밀고 들어가면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병상에 누워계신 할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오셨다.
작은 아빠나 작은 엄마, 삼촌이나 고모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밤을 깎고 있거나 제기를 닦거나 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우리를 맞아 주었다.

대문 옆 외양간에는 소가 있었고 화장실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에는 휴지 대신 할아버지가 잘라놓은 신문지가 있었다. 깔끔 떨기 좋아하는 엄마는 그게 시골서 제일 곤욕스러운 부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대청마루를 밟고 방에 들어가면 손주들이 온다고 어찌나 불을 세게 때셨는지 바닥이 뜨끈뜨끈 했다. 해는 어둑어둑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고 아궁이에서 장작이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차례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자야 하는데 한복이 입고 싶어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뜨끈한 바닥에서 이리저리 몸을 굴려가며 자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았고 다들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녀가 된 막내 고모를 제외하고 모두 모인 가족들은 저마다 맡은 일들을 하며 차례 준비를 했다. 나는 혼자서 한복을 입어보고 옷고름을 매다 매다 실패하고 작은 엄마에게 부탁하곤 했다.

큰 상 가득히 음식이 차려지고 차례를 지내기 시작하면 정정하신 할아버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축문을 읽으시고 항렬 별로 절을 했다. 전국 각지에서 잘 알지 못하는 당숙들이 계속 계속 오셨다. 엄마를 비롯한 며느리들은 상을 차리고 치우고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차례가 마무리되면 우리도 식사를 했다.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아서 양껏 먹고 싶어도 멀미가 무서워서 망설이며 배를 채우고 나면 할아버지가 우리를 앉혀두고 한자를 가르쳐 주시거나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다 보면 갈길이 먼 사람들이 슬슬 채비를 한다.
올 때도 순차적으로 왔듯 갈 때도 한 집씩 떠난다.

우리는 또 외갓집에 가야 하지만 모두 가 버리고 덩그러니 다시 두 분만 남는 그 한옥집을 그때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다시 동구 밖까지 걸어 나가 택시를 타야 했는데 한참을 걸어야 하는 그 거리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기어이 함께 나오셨다. 두 분은 택시를 탄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카시아 나무 밑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드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한옥집 뒤에 있던 선산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아빠와 작은 아빠들은 해마다 벌초를 하러 가지만 나는 그 뒤로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꿈에서는 몇 번, 외양간도, 한옥집 옆에 있던 양조장도, 그 아카시아 나무도 본 적이 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정읍역으로 가서 지금의 익산, 그때의 이리로 가는 차표를 끊느라 어른들은 바빴다. 나와 내 동생은 기차 시간까지 플랫폼에서 짐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했다.

정읍에서 이리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엄마는 그제야 좀 편해 보였다. 6남매의 맏며느리인 엄마에게 시댁에서의 일정은 참 고되었을것이다. 이리에 도착하면, 이리역의 역장이셨던 외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유니폼을 입고 하얀 장갑을 끼고 늠름하게 서 계신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멋있었다.

외갓집은 그 당시 큰 아파트였는데 깨끗하고 넓은 집이었다. 외할머니는 12층 창문에서 우리가 올 때까지 내다보시곤 하셨다. 외갓집에서는 명절 때마다 새우튀김을 한 소쿠리 가득했는데 내가 새우튀김을 너무 좋아해서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외할머니는 새우튀김 많이 해놨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서른 줄에 들어서는 시커먼 장정들이 되었지만 그때 갓난아기였던 이종사촌 동생들이 미리 와 있었고 그 아이들이 나는 너무 예뻤다. 새댁이었던 외숙모들과 청년이었던 외삼촌들이 우리를 반겼다.

친가와는 다른 쾌적한 환경이 그땐 무언가 주변 공기가 환기되듯 새로웠다. 외갓집 식구들과는 무언가를 해야 할 계획 같은 것이 필요 없이, 그냥 먹고 쉬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지금 친정에 가면 그렇듯이, 그리고 남편이 그렇듯이, 엄마는 친정에 가서 외할머니 곁을 서성이며 웃기도 하고 우리를 챙기기도 했고 아빠는 외할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낮잠을 주무시기도 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외갓집에서 자고 서울로 출발해야 하는 때가 오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이리역까지 함께 가셨다. 외할머니는 고쟁이에서 돈을 꺼내 우리 손에 쥐어 주셨고(이 모습을 지금도 모든 손녀 손주들이 기억하고 이야기하곤 한다) 기차가 와서 우리가 타면 창밖에서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며 따라 걸으셨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코가 시큰 거렸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엄마는 못내 허전해 보였다.

서울에 도착해서 부모님은 친가와 외갓집에서 바리바리 싸주신 각종 음식들과 짐, 나와 동생을 챙기고 지하철을 탔다. 우리는 몇 정거장이나 남았냐며 칭얼대거나 부모님께 기대어 잠을 자거나 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어느새 명절은 끝나가고 우리의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기억 속의 어른들은 머리카락이 희끗하게 나이가 들어가거나 세상을 떠나시고, 어렸던 우리가 그 어른이 되어 보내는 명절의 끝자락에서 문득 그때를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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