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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의 다름

기억 저편_권영범

by 바다기린
권영범_기억 저편

정확하지 않다. 나와 너의 다름을 깨달은 시점이. 10대가 되기 전이었던 건 확실하다. 생각이라는 것을, 나라는 존재를 인식한 그 언저리쯤이었던 시기적 막연함이 있다. 하지만 번개가 내 몸을 관통한 듯 저릿하게 온몸을 휘젓고 지나간 그 순간의 느낌은 아직도 몸이 기억한다. 가끔 해리 포터의 이마 흉터처럼 그 어드메를 쓰다듬기도 한다. 살면서 그 다름은 기쁨으로 때로는 충격으로 그 기억을 일깨운다. 그 순간은 내 인생의 노벨상에 견줄만하다.


어릴 적 일찍 글을 뗐다. 신문으로. 지금과는 달리 세로 읽기로 한자가 무지 많았던 신문은 읽을거리가 있다는, 매일 아침 읽을 수 있는 단어가 늘어간다는 만족감에 파고들었던 듯싶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잡지 발행인이셨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동네 도서관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 잡지 광고 사진에 쓰인 100권짜리 소년소녀 세계문학 전집, 신상 만화책, 백과사전 등 나름 다양한 책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어릴 적부터 주어졌다. 책을 읽는 시간은 다른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만나는 지점들은 늘 놀랍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순간들은 아직도 나의 기억 저편 바닥에 침잠했다 어떤 계기로 떠오르기도 한다. 마치 흔들면 눈이 떠오르는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국민학교 5학년 때 인생 친구를 만났다. 화가 어머니 덕분이었을까. 그 친구는 어릴 적 예술적 환경에서 자랐고 학교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친구였다. 사는 곳도 자라온 환경도 무척 다른 우리였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공통점으로 빠르게 절친이 됐다. 그 친구는 예중을 가고 나는 동네 학교로 진학을 하며 물리적 거리와 현실적 만남은 점점 멀어질 게 분명했다. 졸업식날 그 친구는 내게 편지를 손에 꼭 쥐여줬다. 매일 보지 못하는 대신 매주 각자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편지로 전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책 읽기와 편지 주고받기는 몇 년간 이어졌다. 중학교 시절 꾸준한 깊이 있는 책 읽기, 고전과 철학, 문학 읽기는 그 친구와 함께 읽고 나눈 덕분이었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르게 느끼고 표현하는 그 친구와 나의 생각이 내 10대 시절의 고유한 무늬를 직조했고 지금 나라는 사람의 5할은 되지 싶다.


꿈을 꾸면서도 현실에 떠밀려가던 20~30대는 자기 계발, 업무와 관련된 기획, 마케팅 책에 빠져있었다. 가끔 숨통을 틔고 싶어 읽었던 시집만이 유일한 다른 결의 책이었다. 결혼 후에는 육아와 교육 관련 책, 아이들을 위해 읽어주던 그림책으로 조금의 방향 전환이 있었을 뿐이다. 세상으로 다시 나오고 싶은 40대가 돼서야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동네 친구들과 독서 동아리도 만들어 함께 읽기를 이어갔다. 리더로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숭례문 학당에서 독서토론 리더과정도 듣고 동아리 회원들을 리더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며 함께 성장했다. 함께 읽는 독서의 힘을, 서로의 다름을 알아나가며 성장하는 기쁨을 다시 경험했고 믿게 됐다.


어릴 적 그 번개같았던 나와 너의 다름의 충격,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그렇게 내 인생에 선명한 색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들은 흔적을 남기며 현재 진행 중이다. 권영범 작가의 <기억 저편>을 볼 때면 그 자국들이 그 어렴풋한 순간들이 재생 버튼이 눌린 듯 떠오른다. 오늘따라 나의 함께 읽기 첫 경험을 나눈 국민학교 친구 혜원이가 보고 싶다. 미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 친구에게 이 그림을 선물하고 싶다. "나와 너의 다름이 책을 매개로 함께 한 여행은 너무나 즐겁고 특별했어. 우리 다시 그 여행을 떠나볼까"라고 쓴 편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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