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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상자

판도라(Pandora, 1896)_존 월리엄 워터하우스

by 바다기린
존 월리엄 워터하우스 <판도라> (Pandora, 1896)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들썩들썩 열릴 기운이 감지되어 조심 또 조심했지만 그런다고 막아지는 일은 아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들, 침잠했던 뾰족한 조각들이 사나운 파도에 휩쓸려 아프게 박혔다. 숨이 버겁고 머리는 빈틈없이 팽팽해져 무섭게 쪼여온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대화다. 가족들 먼저, 그리고 친구가 떠올라 전화를 건다. 내 탓이 아니라고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렇게 내 힘듦을 배려한다. 그 진심이 나를 움직인다. "괜찮아"라는 그 한마디가 아주 작은 균열을 파고든다. 그때 마음이 열린다. 판도라의 상자는 다시 밀봉된다. 느슨하게 닫힌 그 상자는 언젠가 또 열리겠지. 반복되는 그 상황이 두렵지만 그조차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다.


제우스가 "절대 열지 말라"라며 건넨 상자를 연 판도라. 인간의 호기심은 우리에게 멋진 세상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극을 안긴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희망'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헛된 희망으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걸며 현재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뒤로 미루게 하면서. 어쩌면 이 또한 신의 빅 피처였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 여기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인데 그것조차 놓칠 것인가를 깨닫기 바라는 배려로 그린 큰 그림.


판도라 상자 안의 것들과는 다른, 내가 경험한 작지만 좋았던 것들을 담아두고 싶다.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파고드는 느낌과 감정들을 채우고 싶다. 딱딱해지고 말라가는 심장을 촉촉하게 적시고 뛰게 하고 싶다. 차가운 이성에 가리어진 따스한 감성을 꺼내고 싶다. 늘 논리에 집착하는 것을 가끔은 던져버리고 말랑한 심장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나'를 만나고 싶다.


내게 소중한 걸 담는 상자를 만들어본다. 그리고 그 안에 넣는다. '괜찮아'라는 첫 단어를. 그 상자에 나의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채워진 배려를 누군가에게 나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때 하나를 버리고 내 이름의 상자에 하나를 채운다. 누구나 힘들 때 꺼내 볼 나만의 상자가 하나씩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그림과 작은 상자 하나를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다. 당신의 상자에 넣을 첫 단어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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