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_권영범
권영범 작가의 <어떤 여행>은 나에게 선물 같은 그림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추상이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의 삶도 추상과 구상을 오가며 나아가는 여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뭉개진 듯 덩어리진 부분들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닮아 복잡하고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면 여유로운 세상이 끝없이 펼쳐진다. 결국,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삶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느껴질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멀리서 나를 돌아보면 내가 있던 그곳은 그저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의 푸르고 창백한 하나의 점, 지구처럼. 현재란 뿌연 안갯속 하나의 섬처럼 뚜렷하면서도 가까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현재도 과거가 되면 결국 흐릿하게 사라질 것이다. 좋은 기억은 더 자주 떠올리며 진하게 남기고, 잊고 싶은 기억은 흐려지도록 두면서, 나는 그렇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님은 이 복잡한 공간 속에 작은 벤치를 하나 놓아두셨다. 그 벤치는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그림을 응시할 때 잠시 앉아 쉬던 벤치를 떠올리게 했다.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숨을 고르고,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게 한다. 눈을 감고 마음으로 그림을 느껴보는 시간.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 속에서 예술마저 쉼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메마른 삶일까? 그런 우리에게 작가님이 놓아주신 벤치는 따뜻한 온기와도 같았다.
추상 속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글자 ‘LOVE’는 삶의 목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에게도 그런 목적이 있을까? 지금 떠오르는 건 ‘나다움’이다. 과거에는 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림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한다. 조금씩 표현하고 드러내면서 나는 복잡하고 흐릿한 현실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만나는 여행 중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 소박한 감상글을 작가님께 보냈다.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만큼의 울림이 있었기에 전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작가님께서 답장을 보내주셨다. “여행이란 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일상이 곧 여행이며 여행이 일상이죠.”라며 작업 과정과 작품 세계를 들려주셨다. 감동이었다. 따뜻하게 환대해주시고, 심지어 작업실에 초대까지 해주셨다.
어떤 작품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발걸음을 멈추게 할 때, 그 순간의 감정을 꼭 남겨두라고 권하고 싶다. 글이든 그림이든 형태는 상관없다. 그리고 그 표현을 작가님께 전해보는 것도 좋다. 내가 만난 작가님들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누군가 말 걸어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그렇게 작품과 작가를 통해 이어지는 만남은 언제나 내게 선물 같은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