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은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다.
사당과 낙성대 가운데쯤 위치한 옥탑방에 살았다. 어느 역에 내려도 살벌한 오르막을 올라야 했는데, 그나마 낙성대역에서 올라가는 게 나았다. 급격한 오르막길 하나만 견디면 옥탑방이 위치한 평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사를 고민하던 즈음, 골목 맞은편 관악산 중턱에 내려앉은 햇볕을 보고 지친 걸음을 멈추었다. 2년 가까이 살았던 집은 누수, 집주인의 몰상식함, 층간소음 등 여러 문제를 지니고 있어 거처를 옮기기로 했으나 동네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가파른 오르막이 버겁긴 했어도 운동 삼아 걷는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고, 밤이 되면 골목이 어두워지지만 주위로 큰 빌딩이 없어 네온사인으로 잠을 설치지 않았다. 골목 밑, 시장에서 파는 분식을 좋아했고 희귀채소들을 들여놓는 가게를 애정했다. 떠날 생각을 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집 맞은편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어머님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간식을 사러 들를 때마다 나의 얼굴 기억하고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뜨내기 생활로 좀처럼 단골가게가 없었는데 나를 기억해주는 것이 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일이 끝나고 어두운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할 때도 환하게 열려있는 편의점을 보면 괜히 안심되었다. 이 동네와 헤어질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관악산의 산봉우리를 보며 ‘내가 갈 동네에도 저런 햇볕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이 동네를 떠나기 전, 나와 동거인 그리고 메뚜기처럼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는 친구들을 위해 글을 쓰기로 했다. 구성안은 술술 써졌다. 마음이 움직이니 손은 잘만 따라갔다. 그런데 마음과 손을 붙잡는 머리가 있었다. ‘너 또 네 얘기 쓰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손이 탁! 하고 멈췄다. 시나리오를 쓰기 문득 두려워졌다. 한동안 내가 만드는 이야기의 품이 작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 학우들이 제출하는 스릴러나 로맨스 장르물 또는 사회이슈에 대한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보고 위축되었다. 내 이야기가 보잘것없나. 나의 영감들은 주위에 널려있는데 주변은 안온하고 평범했다. 그러니 나의 이야기도 작고 소소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아주머니의 인사, 관악산 산등성이에 내려앉은 햇볕, 희귀한 채소를 파는 시장 등등. 어떨 땐 나의 평범을 저주하기도 했다. 온 세상은 좀비, 재난 등으로 가득한 블럭버스터인데, 홀로 소리치는 아니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머리가 전한 ‘너 또 네 얘기 쓰게?’ 가 마음에 콕 하고 박혔다.
주인공들이 이사하려면 동네에 전염병을 돌게 해야 하나? 아니면 좀비를 등장시킬까? 그러면 이걸 어떻게 찍나. 재난은 어떤가. 관악산을 무너뜨릴까. 돈도 없는데 그런 걸 어떻게 찍어. 그러면 시나리오 속 커플을 불륜 스토리로 만들까.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큰 이야기들을 따라 해보려는데 옆 방에서 쿵쿵! 큰 소리가 났다. 옆집과 가벽으로 집을 나눈 건지 방에 있으면 옆집의 대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내 머릿속에 떠다니는 대사들은 사라지고 옆 집의 대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2년 동안 몇 날 며칠 소음에 시달렸고 오가며 마주칠 때 부탁을 드렸지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파티하는 옆집 소음에 못 이겨 노트북을 접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시나리오도 안 써지고 배려가 없는 옆집 때문에 발을 구르며 골목을 걷는데, 건물 앞 담장에 치즈색 길고양이가 누워있었다. 동네 주민들의 정성을 먹고 자란 고양이는 사람에 대한 경계 없이 배를 내민 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비집고 내려온 햇볕이 고양이 등 위에 묻었다.
사소하다. 더 이상 옥탑방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뛰쳐나온 이유도 사소하고, 동네를 떠나기 싫다고 발을 붙잡는 고양이를 향한 애정도 사소하다. 좀비와 재난 그 밖에 다양한 이유에 비하면 너무 작다. 그러나 보잘것없다고 말하면 서운하다. 2년 내내 시달린 소음은 나에게 너무 중요한 문제고, 오가며 마주쳤던 고양이를 보기 힘들어진다는 건 꽤 서글프다. 그러니 작을 순 있지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극장을 휩쓰는 블록버스트를 종종 본다. 현실에서 도피 된 기분이 짜릿하다. 그러나 극장을 나오면 나를 흥분시키는 건 사소한 일들이다. 카라멜 팝콘이 세일한달지, 4층 극장 화장실에 사람이 꽉 차서 볼일을 볼 수 없달지.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작은 순간들이다. 아직 재난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좀비를 만나지 않았으니 섣불리 그들의 감정을 쓰긴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방식의 영화를 찍기로 다짐했으면서 여전히 주위 눈치를 본다.
‘내 얘기가 사소하면 어쩌지’
사소하고 작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는 우리가 좋아하는 작업을 하기로 했으니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월세가 올라 이사를 해야 하고, 중고거래를 했던 동네 주민과 헤어져야 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를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담은 작은 이야기를 영화로 담기로 했다. 우리는 작은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