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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이모 Mar 02. 2022

둘째 언니의 칠순을 축하하며

Happy Birthday to my sister Mrs Werth

칠순이라는 제목을 달고, 또 그래서 글을 쓰게 되었지만, 우리 둘째 언니는 70세와는 거리가 멀게 젊고 명랑하다. 얼굴뿐 아니고 생각, 행동, 말, 패션, 등등등....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다 형부를 만나 독일에 간 우리 둘째 언니는 전설도 많다.  


외국대사관에 근무하고 또 석사논문도 '해외에서 한국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해 썼던 나는 이러한 연구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 바로 외국에서 생활하는 교포들의 말 한마디 몸짓하나라는 것을 우리 둘째 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둘째언니는 요즈음 말로 국뽕 원조인것같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어쨌든 알리고 또 한인들끼리 뭉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하셨다.   독일에서 특화된 ㅇㅇ를 제작하는 엔지니어인 독일인 형부가 회사에서 가족들과 대규모 야외 가든파티 겸 바자회가 있었던 때 일이다.  아마 1990년대 후반 즈음.  회사 CEO의 인사말이 있고 이제 임. 직원 가족들이 격 없이  BBQ도 즐기고 기금 모금을 위해 만든 장식품이나 화분 같이 소규모 장터도 열렸는데 돈을 내는 바구니 앞에 'For Korea (독일어로)'라고 쓰여있어서 담당자를 찾아가서 한국에서 올림픽도 하고 곧 월드컵도 열릴 건데 얼마나 잘 사는 나라라고 조용히 알려 주었더니 점심 먹고 오후에 가니까 'For Africa'라고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셋째 언니와 함께 빨간 '대-한민국!' 셔츠를 입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가방에 티셔츠를 잔뜩 넣어서 한국 응원하라고 동네 사람들 다 나누어주고 그래서 언니가 지나가면 독일 사람들이 먼저 '대-한민국, 짝짜작 짝짝' 박수를 치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동네 대소사 다 챙기고 무거운 카메라 들고 사진 촬영했다가 생일 때 동영상 만들어 주고 힘들고 아픈 집 있으면 잡채랑 김밥이랑 독일 음식과 함께 만들어 배달하고 나누는 일을 오래 했으니 누구든 좋아하지 않을까.



언니는 노래도 참 잘하신다.  형부 일의 특성상 외교관처럼 여러나라에서 2-3년씩 근무하셨는데 그때 마다 빠지지 않고 따라다녔던 중요한 이삿짐이 바로 노래방 기계.  가는 곳마다 친구들을 사귀고 이사가서 몇주만에 언니집은 그 지역 핫플로 등극한다.  맛있는 한국 음식이 넘쳐날 뿐 아니라 노래방 기계가 딱딱한 유럽인들의 마음을 녹이기에는 제격이였던것.  하지만 나는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맞춘 언니의 독이어 가곡 실력이 훨씬더 주목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언니의 들국화는 어떤 아티스트의 노래 보다 맑고 아름답다.  언제든 꼭 한번 더 들려 주시기를.



실비아가 아기때 동남아 국가에서 생활해서 늘 1일 1 수영장을 생활화 할 수 밖에 없었던 언니는 내 아이들을 돌봐 줄때 늘 돌고래 놀이를 해 주었는데 그건 바로 다리사이를 수영해서 빠져 나가기.  어느 정도 수영실력도 있어여 하고 물속에서 숨도 참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안달 부인인 나로써는 그 몇초도 참 길게 느껴지는데 언니는 아이들을 물속에서 참 잘도 잘 다루신다.  그런데 언니는 정작 해변에서 수영하는 걸 싫어 해서 호주에서 지낼때 상어가 나온다는 소문을 믿고 우리는 단 한번도 바다수영을 하지 못했다...


이런 언니와의 추억도 사실 꽤 최근의 일들.  내가 10살 남짓했을 때 언니는 이미 해외 생활을 해서 어렸을 때 추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편지와 전화를 통해 늘 좋은 이야기를 해 주시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 오라고 해주셨다. 또 피아노 치면서 복음성가 불러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내드리면 너무너무 잘한다고 좋아하시며 칭찬의 편지와 용돈을 주시던 기억이 난다.  나는 또 칭찬을 받고 싶어서 참 열심히도 노래하고 피아노 치고 혼자서 녹음기를 친구 삼아 긴 시간을 보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둘째가 유치원 때 나는 호주에 Graduate diploma를 하러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독일에서 남호주 까지 날아와 내가 학교 간 사이 아이들과 놀아 주시고 주말에 또 재미있게 보냈던 기억도 새롭다.   둘째 언니와 호주에서 시간을 보내며 남호주 특히 에들레이드가 독일인 이민자가 많았다는 것이 어쩐지 우연 같지 않았다.  그 후 형부가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정말 7년간 틈만 나면 부산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내가 아파서 한 달 병가를 쓸 때도 언니 집에서 편안히 요양할 수 있었다.



그런 언니가 70세 생일은 꼭 한국에서, 우리 집에서 묶으시면서 파티를 하고 싶어 하셨다.  나도 이번만은 언니를 내 집에서 편안히 모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오미크론이 또 심해지면서 한국 방문은 또 지연되었다.   내일은 언니의 생신.  언니는 언니답게 주일에 소정에 상금을 내건 성경퀴즈 이벤트로 생일 파티를 대신하기로 했다고 하셨다.


엄마가 60회 생신 때 독일에 조카 실비아를 보러 가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엄마 70회 생신 때 선물해 드렸던 반주자용 찬송가도 기억이 난다.  엄마의 책과 편지가 있는 가방을 여니 우리 둘째 언니가 아마 외국 생활 초기에 엄마에게 보내신 편지가 있다.  1982년 11월 싱가포르에서 보내신 거다.  엄마에게 안부 그리고 꼭 바울의 편지처럼 주님 은혜 감사하며... 외국에 살면서도 교회에 가서 찬양하고 또 그 감격에 다시 감사를 나누는 모습... 젊은 우리 둘째 언니의 모습이다.  그 후에도 동생들 때마다 챙기고 편지로 선물로 기 살려주고 기회 될 때마다 불러서 공부하라고 도와주고...   40년 전 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독일에서 온 편지와 카드들은 종이로 된 것이 아니라 겨자씨였구나. 믿음의 겨자씨.


코로나 사태가 좀 나아진다면 이번 봄에는 언니 생일을 함께 못했지만 내년 봄에는 꼭 서울이든 독일이든 함께 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기를.  언니 생신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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