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시, 내 작품을 말한다
김미희
-전문 <<달님도 인터넷 해요?>>(아이들판, 2007)
-전문<동시발전소>(2021 겨울호)
어느 날 우리 신부님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단다. 6중 추돌 사고가 났다. 신부님은 네 번째 운전자였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다. 경찰이 왔다. 취조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운전자에게 물었다.
"몇 킬로미터로 달렸습니까?"
첫 번째 운전자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85킬로미터로 달렸슴미더. 제가 이래 봬도 베스트 드라이버 경력이 20년이라예."
두 번째 운전자에게 물었다.
"분명 80킬로미터로 달렸습지요."
경찰은 신상 명세와 함께 법정에 설 죄목이 낱낱이 새겨지기만 기다리는 백지에 받아 적었다.
세 번째 운전자도 규정 속도를 지켰다고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대답했다.
드디어 신부님 차례가 되었다. 신부님은 고민에 빠졌다. 규정 속도를 어긴 건 사실이다. '고고씽' 신나는 질주였다. 그럼에도 하느님이 보살피사 간신히 목숨을 건졌음에 성호를 그었다. 명색의 신부인데 정직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앞서 말한 순하디 순한 양들의 말을 뒤집으며 모른 척할 재간은 없다. 안절부절, 하느님을 소리쳐 불렀다. 말씀으로 계시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아, 신부님이시군요. 신부님, 몇 킬로미터로 달렸습니까?"
급브레이크 과정에서 바퀴가 남긴 검은 혈흔, 스키드 마크로 감식을 마친 경찰은 실망하던 차에 한 줄기 희망을 본 것이다. '거짓말을 일삼는 무리를 응징하라고 신부님을 내게 보냈구나.' 하는 눈빛으로 '신부님'에 강세를 넣어 결기 가득한 어조로 경찰은 거듭 물었다.
"저야 물론!"
신부님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기대에 찬 경찰 눈빛이 반짝 다이아몬드를 만들며 빛났다. 경찰도 침을 꿀꺽 삼켰다.
"몇 킬로미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사람들과 같은 속도로 달렸습니다."
신부님은 진땀깨나 흘렸다. 정직했으며 양들을 팔아넘기지도 않았음에 안도했다.
신부님은 '성직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참으로 어렵구나.' 절감하셨단다.
어디 신부님뿐이랴. 나도 엄마 안 하고 싶을 때 많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배 속 아이에게 열정적으로 말을 걸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아이의 말문을 두드리라'라는 광고가 있었다. 배 속의 아이라면 그럴 수 있다. 배 속의 아이는 얼굴을 붉히고 반항하듯 방문을 '꽝' 닫지 않는다. 시험 기간 보란 듯이 줄창 컴퓨터 게임을 해대지도 않는다. 착한 태아에게는 얼마든지 조심조심 말문을 두드릴 수 있다. 이론은 머리의 영역일 뿐 감정만 끓어올라 폭발하고 식어 굳어진 바윗덩이들은 가슴속에 또 얼마나 쌓였던가? 하지만 시를 쓰면서는 엄마인 나를 돌아볼 수 있었고 고요를 맛보며 나의 기원을 피력할 수 있었다. 다분히 성직자의 자세로 엄마 역할을 반성할 수 있었다. 이 시들은 내게 면죄부 같은 건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는 착한 일을 백 번 하며 지극한 기원으로 너를 기다렸고 오로지 너이기를, 너여야만 했다는 점지설 하나쯤은 가져야 마땅하기에. 그래야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댈 수 있는 카르텔로서의 동시를 쓰고 싶었다. 시인인 나는 부모이고 어른이기에 아이들이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알기를 바랐다. 존재 증명의 선언 너머 각인이 되기를 바랐다.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믿는 구석 같은, 깊숙한 서랍 속 금반지 같은, 텔레비전 위에 걸린 액자 같은, 지갑 속 사진 한 장 되기를, 바탕화면에 띄워두는 희망 같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너를 세상에 불러들인 이유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사랑을 표현해야지 마음먹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받은 사랑을 네게 주는 것이고 너는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렇게 세상에 따스함을 퍼뜨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자 했다. 작품이 얼마나 이 마음을 구현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동기와 바람은 충만했다.
최근에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듬성듬성 읽었다. 제목이 스포일러라 그렇게 읽게 되었다. 아마 제목에서 이미 수긍했기 때문이겠다. 본문은 제목이 된 결론을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증명한다.
자연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곳”에 비유했던 것과는 다른 주장이다. 저자인 헤어와 우즈가 말하는 생존의 필수 요소는 ‘친화력’으로, 우리 종은 타인과 마음으로 소통함으로써, 감정 반응을 조절하고 자기 통제력을 갖추며 생존에 유리하게 진화한 것이란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찬란한 명제가 동시를 읽고 쓰는 내게 찌릿한 떨림을 주었다. 반짝 불이 켜지는 느낌. ‘살아남는다’가 주는 생존의 종결어의 단서가 다정함이라니. 진화의 승자가 최적 자가 아닌 ‘다정한 자’라니!
무용함의 효능을 주장해온 문학가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인류 진화론이라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감성에 빚지고 살아가는 시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아 진위를 떠나 고마웠다.
내 고향은 우도이다. 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고령화가 가속되고 관광지가 된 섬은 자구지책으로 민박을 허용했다. 아버지도 텅 빈 집에 손님을 들이기로 했다. 먼저 상호 등록을 해야 했다. 글을 쓰는 딸이라고 기댈 깜냥도 아니어서 나는 개입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갔더니 민박집 간판이 올레 담장 위에 걸려있었다. 다정민박. 아버지는 어떠냐? 내 작명이. 딱이지 않냐. 찰떡같이 지었다고 자부하며 간판 상호를 발음할 때마다 친절 버튼이 작동한다는 듯 웃음을 띠며 말했다. ‘다정’, 당시 나는 이 존재론적 단어가 밋밋하고 식상하다고 느꼈다. 상호가 그저 그렇다는 속마음이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았는지 확신할 순 없다. 뒤늦은 후회와 당시의 나에 대한 연민은 이제 와 부질없다. ‘다정’은 아버지의 연륜이 고심 끝에 내놓은 이름이었는데 당시 나는 미개했다. 지금은 간판도 없고 민박도 하지 않지만 어쩌면 하루를 묵어가는 누구에게든 이름으로 인하여 심적 편안함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겠지. 아버지는 이미 진화한 종에 닿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수사학 <<레토리카>>에는 남을 설득하려면 3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로고스, 즉 논리가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파토스, 듣는 청중의 마음에 공감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설령 논리가 조금 덜해도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을 읽는다면 설득이 된단다. 중요한 마지막 하나는 바로 에토스인데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달렸단다.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 선하게 살았는지, 그간 살아온 그의 행적이 설득의 양상을 결정한단다. 논리도 조금 부족하고 공감을 전하는 방법이 서툴더라도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알면 “네, 알겠습니다” 하게 된다는 것.
엄마가, 아빠가, 부모인 내가 시를 쓰는 것도 어쩌면 이와 같은 설득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래요. 맞아요. 당신의 말은 옳아요.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 진심이군요. 믿음을 주는 것. 시인이 숨을 곳은 글에 있지 않다. 조금 화려하고 조금 과장하고 조금 아닌 척할 순 있지만 시인의 생각은 들킬 수밖에 없다. 좋은 삶이 좋은 시를 낳으니까 에토스를 가진 내가 되는 게 먼저다. 그러다 좋은 시를 낳으면 감사한 일이다. 설령 시가 못 된대도 좋다. 그런 삶은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이 어디든 고귀할 테니까.
다정하기 위한 시. 다정을 구현하는 시인의 방식은 시를 쓰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어른인, 내 동시에도 ‘다정’ 간판이 걸려있기를 바란다.
김미희: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달리기 시합’으로 등단,
그동안 낸 책으로 청소년시집 『외계인에게 로션을 발라주다』,『지구를 굴리는 외계인』,『마디마디 팔딱이는 비트를』, 시 창작 안내서 『놀면서 시 쓰는 날』,
동시집 『영어 말놀이 동시』,『예의 바른 딸기』,『동시는 똑똑해』,『오늘의 주인공에게』
동화 『이야기 할머니의 모험』,『우리 삼촌은 자신감 대왕』,『마음 출석부』,『한글 탐정 기필코』,『얼큰 쌤의 비밀 저금통』 인문 교양서 『공부를 해야 하는 12가지 이유』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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