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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Mar 01. 2020

패하지 않았으나 패한 전쟁

프랑스 조계지 멍즈와 첫 국제철도 뎬웨철로

윈난에는 ‘불통국내통국외(不通国内通国外)’라는 말이 있다. 국내와 불통인데 외국과는 통한다?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철도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윈난과 베트남을 연결하는 ‘뎬웨철로(滇越铁路, 전월철로)’ 이야기다. 그 시작은 ‘굴욕의 세기’에 일어났던 또 하나의 전쟁, 청프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중엽 인도차이나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공격해 사이공 조약을 맺고 남부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양이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베트남 전역을 병탄하기 위해 북상한다. 전통적 조공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청나라는 가만 있지 않았다. 베트남 접경에 윈난·광시군을 투입했다. 청나라는 태평천국군 잔당으로 북베트남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흑기군과 연합해 항전을 벌였다. 당시 조정에선 온건파 주화론자와 강격파 주전론자 간 갈등이 심했다. 대표적 주화론자 이홍장은 프랑스와의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양국 간 합의는 전세(戰勢)와 자국 내 정치적 상황으로 뒤집히기를 거듭했다.


전장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극동함대는 타이완을 시작으로 푸젠성 푸저우(福建省福州, 복건성 복주), 저장성 닝보(浙江省宁波, 절강성 영파)를 거쳐 북상했다. 베트남 북부와 중국 연안의 전세가 달라 누구도 일방적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각국 내부에서도 전쟁을 지속할 정치적 힘을 갖기 어려웠다. 1885년 청나라 조정은 철병을 결정하고, 6월 9일 톈진에서 프랑스와 ‘중프신약’을 체결한다.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베트남과의 접경 지역 두 곳에 통상 구역을 지정하고 관세율을 낮추기로 했다. 중국 내에서 철도 건설이 추진될 시 프랑스와 협상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런 불평등 조약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프랑스는 승리하지 않았으나 승리했고, 중국은 패하지 않았으나 패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윈난은 이렇게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진출 발판이 되었다.


이후 상세 협약에 따라 윈난에서는 먼저 멍즈(蒙自, 몽자)가 개방되었다. 베트남과 홍허(红河) 물길로 이어진 만하오(蛮耗, 만모)도 함께 개방된 지역이다. 멍즈 현성 동문 밖에는 통상 조계지가 만들어졌다. 해관과 프랑스 영사관이 설립됐고, 이탈리아, 독일, 미국 영사관이 잇따라 들어섰다. 외국 무역상사, 은행, 학교, 교회, 교도소, 그리고 매춘 업소까지 생겨났다. 


지금도 멍즈 중심가 남호(南湖) 주변에는 당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멍즈해관, 가장 큰 무역상사 중 하나였던 거루스양행(哥胪士洋行),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사관 옛 건물 등을 볼 수 있다. 옛 해관 건물은 전시관으로 꾸며져, 중국 근대화의 굴욕적 시작과 윈난 지역 개방의 역사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해관을 나와 길을 건너면 호숫가에 이국적인 노란 건물이 눈에 띈다. 주 멍즈 이탈리아 영사관이었다가 프랑스의 뎬웨철로 총국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화사한 서양식 2층 건물에서는 시끌벅적한 파티가 자주 열렸고 건물 주변에 각양각색의 꽃과 식물도 심어져 있어, 현지인은 이곳을 프랑스 화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화원
멍즈해관 옛터와 남호

무역에 있어 물류 운송을 위한 철로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프랑스는 베트남 하이퐁, 하노이, 라오카이를 거쳐 윈난의 허커우(河口, 하구), 멍즈, 그리고 쿤밍까지 이어지는 뎬웨철로 건설을 시작했다. 뎬웨철로는 궤도 폭 1미터의 협궤철로였다. 건설비와 유지보수비가 적게 들고 지형이 좋지 않은 지역에도 건설하기 쉬워서 식민지 시기 철도가 건설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는 협궤철로가 많다. 


뎬웨철로의 베트남 구간은 1901년 착공해 1903년 완공, 윈난 구간은 1904년 착공해 1910년에 비로소 준공되었다. 험준한 산지와 강물을 가로지르는 800여 킬로미터의 철로 건설에는 전국에서 모집한 30만 여명의 노동자가 투입되었는데, 7년의 건설 기간 중 8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1910년 4월 1일 전 구간이 개통된 뎬웨철로는 윈난 역사상 첫 철로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국제철로였다. 이것이 ‘불통국내통국외’의 시작이다.


이후 기차는 마방의 역할을 대체하며 윈난의 대외무역에서 주요한 운송수단이 되었다. 기차 노선인 쿤밍(昆明, 곤명), 청궁(呈贡, 정공), 카이위안(开远, 개원), 멍쯔(蒙自, 몽자), 허커우 지역의 경제도 발전했다. 1910년 뎬웨철로를 통해 쿤밍까지 발전기가 들어왔고, 그 덕분에 중국의 첫 수력발전소 ‘스롱바 수력발전소(石龙坝水电站)’도 탄생할 수 있었다.



뎬웨철로의 물류 허브, 비써자이


멍즈해관에서 15킬로미터 북쪽 외곽지역에는 뎬웨철로 중심역이던 비써자이(碧色寨, 벽색채)가 있다. 지금도 중심가에서 버스로 40분 이상을 가야하는 외진 곳이다. 10여 가구 남짓 사는 촌락에 불과했던 비써자이는 기차역이 생기면서 승객과 물류가 바삐 오가고 무역시장이 열리는 번화한 마을이 되었다. 장날에는 유동인구가 4000여 명, 짐을 싣는 말도 3000~4000필에 달했다고 한다. 광둥인은 이곳에 무역 객잔을 열었고, 국제 석유회사 엑손모빌과 로열더치셸 아시아도 이곳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뎬웨철로의 물류 허브 비써자이는 ‘리틀 홍콩(小香港)’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대단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멍즈에서 못 구하는 것도 비써자이에 가면 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북부 베트남에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중국은 안보를 위해 베트남 국경 허커우부터 비써자이 구간 선로를 철거해버렸다. 1956년 복구되어 중국-베트남 간 국제 수송이 재개되었는데, 지금도 오랜 역사의 협궤 위로 화물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방된 철로 위를 오가는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서 역내 구간을 지날 때는 경적을 울리며 속도를 낮춰준다. 비써자이에는 기차역과 차량기지, 파출소, 거루스 여관, 아시아석유공사 창고, 프랑스 직원 숙소 등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커다란 아치형 문을 들어서면 드넓은 홀이 펼쳐지는 대통공사 옛 건물을 보면, 당시 윈난 최대 물류회사의 사업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풍 건축물인 역사(驛舍)의 두 번째 문에는 ‘북회귀선’이 지나가는 지점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쇄락한 물류도시 비써자이가 최근 다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문화대혁명 이후 중월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펑샤오강 감독의 영화 ‘방화’ 촬영지로 입소문을 타며 애국시민들의 관광지로 급부상한 것이다. 역사 주변은 인민군 복장을 빌려 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중국인이 많아 마치 영화 세트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근대화의 비극을 간직한 유적은 그렇게 애국주의 열풍을 타고 중국 5060의 놀이동산이 되었다.

인민해방군 복장을 빌려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중년의 단체관광객

 

한편, 비써자이와 함께 개방된 만하오도 육로와 수로를 잇는 물류 허브로 급성장한 곳이다. 해관 관세 업무는 1897년 6월 허커우가 대체하게 되었지만, 뎬웨철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곳은 홍허 수로의 중심 부두로써 베트남과 홍콩, 내륙으로는 멍즈, 거지우, 쿤밍을 잇는 역할을 했다. 주요 수출품은 주석, 구리, 납, 아연 같은 광물 자원과 실크, 백약 등 윈난 특산품이었고, 수입품은 유럽에서 생산된 성냥, 촛대, 양철통, 시멘트, 우산, 램프 등의 일상용품이었다. 당시 일일 물동량이 1천 톤, 많을 때는 1만 톤을 넘어섰다고 한다. 만하오는 윈난에서 드물게 외래 유입 인구가 만여 명에 달하는 번화한 도시였다.


뎬웨철로 개통 후 주석 상인들의 요청에 따라 비써자이로 연결되는 새 철도 노선도 부설되었다. 광산이 많은 거지우(个旧, 개구), 토지가 비옥한 젠수이와 스핑(石屏, 석병) 등 서쪽 지역을 연결하는 거비스철로(个碧石铁路, 개벽석 철로)였다. 상업 자본에 이해 건설 운영된 중국 역사상 유일한 민영 철도다. 1915년 공사를 시작해, 장장 21년간의 공사 끝에 1936년 10월에야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거비스철로는 궤도 폭이 600밀리미터 밖에 안 되는 중국 유일의 촌궤철로(寸轨铁路)였다. 표준은 통일해야 효율적인 법인데, 뎬웨철로와 궤도 폭을 통일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지역 산세가 험해서 건설과 운영 효율성 면에서 촌궤가 합리적이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뎬웨철로와 직접 연결될 경우 프랑스인에게 철도 운영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거비스철로의 일부 구간은 지반, 교량, 터널 모두 언제든 미궤철로로 확장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니, 후자의 이유가 더욱 설득력 있어 보인다.


쌀 대신 낭만을 실어 나른다, 건수고성 소화차     


젠수이에 가면 빠지지 않고 체험해야 하는 것이 있다. 거비스철로의 일부 구간을 달리는 낭만열차, 건수고성 소화차(建水古城小火车)다. 교통 환경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은 촌궤 거비스철로는 2003년 여객 운행을 중단했다. 2010년부터는 화물운송까지 모두 멈췄다. 린안(临安, 임안 : 젠수이의 옛 지명)에서 외곽지역 청룽차오(双龙桥, 청룡교), 샹후이차오(乡会桥, 향회교), 600년 역사의 고택 마을 퇀산춘(团山村, 단산촌)까지 12.82킬로미터 구간은 미궤철로 관광열차로 개발해 2015년부터 운행하고 있다.      

젠수이구청 근처에 있는 린안역에서 소화차를 탑니다.


속도가 20km/h도 안 됩니다. 뛰어가는 게 더 빠르려나요? 탑승 때 나눠준 사자고와 물을 간식으로 느린 여행을 즐겨봅니다.


소화차는 젠수이고성 동문 조양루에서 도보 10분 거리 린안역에서 하루 두 번 출발한다. 옛 역사 세 곳에 정차할 때마다 잠시 내려 주변을 구경할 수 있다. 탑승할 때 나눠준 젠수이 특산 유과 ‘사자고(狮子糕)’를 먹으며, 시속 20킬로미터 열차 안에서 시골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는 고속철에선 느낄 수 없던 낭만이다. 청불전쟁이 남긴 굴욕적 근대화의 흔적은 이렇게 관광 상품이 되어, 후대 사람에게도 잊혀 지지 않는 추억을 남겨주고 있다.

교각의 아치가 17개라서 스치쿵차오십(十七孔桥, 칠공교)라고도 불리는 청룽차오(双龙桥, 청룡교)
건수고성 소화차의 종점역인 단산역
단산촌의 옛 민가 건축물
단산촌 특산품은 짚이나 대나무 줄기로 짠 라탄소품. 동네 골목에서 방석을 짜는(编垫子) 할머니를 만나 미니어처 하나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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