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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Mar 18. 2020

전쟁 중에도 교육은 계속된다

윈난육군강무학교와 국립 서남연합대학

명문 학교란 무엇일까? 재학생을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고등학교? 고시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대학? 부자 동문이 많은 학교? 


이런 정의는 어떨까? 역사를 바꾼 인재를 키워낸 학교. 윈난성 성도 쿤밍의 유명 관광지 취후공원(翠湖公园, 취호공원) 근처에는 그런 의미의 명문 학교 두 곳이 있다. 70여 년 전 폐교되어 지금은 엣 건물만 남아있지만, 중국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학교다.


취후공원

취후공원 서문을 나서니 길 건너 샛노란 서양식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윈난육군강무학교(云南陆军讲武学校).  중국은 물론 아시아 3개국 군사 지도자를 배출한 명문학교다. 이곳은 본래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 정부가 신식 육군 양성과 국경 방어를 위해 1909년 설립한 ‘윈난육군강무당(云南陆军讲武堂)’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곳 출신 선생과 학생들이 신해혁명 시기 청나라를 전복하는 윈난 지역 군사 봉기의 중심이 되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교무실로 사용되던 3층 건물이 보이고, 그 밑으로 난 아치형 통로를 지나자 연병장이 나왔다. 넓은 공터를 2층 건물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과거에는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되었을 텐데, 지금은 박물관과 기획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관 2층 매점에서는 건물 모양을 꼭 닮은 아이스바를 판매한다. 젊은 관광객 사이에서 이걸 들고 인증숏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다. 그간 윈난이 차와 소수민족 이미지로 굳어져서 어르신 관광지가 되는 것이 아쉬웠던 나는 이참에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어보기로 했다. 분홍색 딸기맛, 녹색 녹차맛, 노란색 망고맛 중에 건물 색과 같은 망고맛을 구입했다. 들고 나가는 동안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촬영에 지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마음 졸인 것도 잠시, 건물 밖으로 나오니 칼바람이 쌩하고 불었다. 하필 이날 기온은 영상 1도, 촬영 내내 아이스바가 녹기는커녕 성에도 가시지 않았다. 맨손으로 아이스바를 들고 한 손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엄동설한에 뭐하나’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차가운 날씨에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인증샷을 찍어보니, 인싸의 길은 멀고 험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텅충의 은행촌, 젠수이의 미식거리 앞에서도 라이브를 하는 유튜버를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제야 새삼 이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망고맛으로 인증샷! 하필 이날 기온은 영상 1도, 아이스크림이 녹기는커녕 성에도 가시지 않습니다. 인싸의 길은 멀고 험합니다.


황푸군관학교에 영향을 준 원조 명문 사관학교


중국 군사학교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쑨원이 1924년 광저우에 세운 황푸군관학교가 많이 알려져 있다. 약산 김원봉 등 의열단과 항일 운동가들이 대거 군사 교육을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황푸군관학교는 사실 윈난육군강무학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곳이다. 설립 당시 교관과 조교를 파견해준 곳이 윈난육군강무학교였고, 황푸군관학교에서 사용하던 교재들도 윈난에서 가져온 것이 많았다. 


윈난육군강무학교는 군사학뿐 아니라 교양 과목과 제2 외국어, 실전 군사 훈련까지 완성도 높은 커리큘럼을 갖추고 중하급 군관을 양성했다. 교관 대다수가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라, 학교는 이를 모방한 시스템에 따라 엄격한 규율로 운영되었다. 그렇게 배출된 졸업생은 여느 학교 출신보다 우수한 군인으로 평가받았고, 항일전쟁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일전쟁 종료 후 1945년 문을 닫을 때까지 윈난육군강무학교는 22기에 걸쳐 졸업생 9천여 명을 배출했다. 그중에는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적지 않다. 쑨원을 따라 혁명에 뛰어들었다가 공산당으로 전향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이끌었고, 이후 우리로 치면 국회의장 격인 전국인민대표회 상무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낸 두 인물이 대표적이다.


1911년 졸업생 주더(朱德 주덕)는 1927년 8월 1일 난창봉기 당시 군대를 지휘한 인물이다. 난창봉기는 군사적 측면에선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받지만, 공산당의 독자적 군사 활동이 시작된 사건으로 정치적 의의가 있다. 이후 홍군이 창설되고 제2차 국공합작 당시 팔로군을 거쳐 인민해방군이 탄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건군 기념일도 8월 1일이다. 주더는 팔로군과 인민해방군 총사령을 맡아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을 이끈 공신이었다. 공산당 정권 수립 후에는 국가 부주석을 역임하기도 했다.


혁명원로 예젠잉(叶剑英, 엽검영)도 윈난육군강무학교 출신이다. 졸업 후 쑨원 휘하에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예젠잉은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공산당이 수세에 몰리던 시기에 오히려 전향하여 입당했다. 항일전쟁 중에는 팔로군 참모장으로 린뱌오(林彪)를 도왔고, 공산당 정권 수립 후에는 국방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대장정 기간 마오쩌둥을 위기에서 구한 인연으로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고초를 면할 수 있었다. 군사 실권자로서 마오쩌둥 사후 4인방 체포를 주도했고, 권력 공백기에 국가 원로와 힘을 합쳐 덩샤오핑을 지도자로 세움으로써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중국의 군사 지도자뿐만이 아니다. 윈난육군강무학교는 조선과 베트남 출신 졸업생도 200명 이상 배출했다. 호찌민과 함께 베트남 독립을 이끈 전쟁영웅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장군, 베트남 임시정부 주석 응우옌 하이 탄(Nguyễn Hải Thần),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최용건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항일 무장투쟁 선봉장이자 ‘국군 창설의 아버지’인 이범석, 대한민국 첫 여성 비행사이면서 해방 후 공군 창설에 기여한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 권기옥도 이곳 출신이다. 윈난육군강무학교 기병과에 재학 중이던 이범석 장군은 3.1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 무장 항일투쟁에 나섰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1940년 광복군 창설에 참여해 참모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37년 마오쩌둥(오른쪽 두 번째)과 함께 한 예젠잉(왼쪽 첫 번째)과 주더(왼쪽 세 번째)의 모습(출처: 바이두)


윈난항공학교가 여성에 문을 연 웃픈 사연


권기옥 여사는 윈난육군강무학교 내에 개설된 중국 최초 비행학교 중 하나인 ‘윈난항공학교’ 출신이다. 1922년 첫 신입생 모집에는 지원자가 대거 몰렸다. 그런데 이 무렵 교관 두 명이 비행 중 큰 사고를 당하자 비행반 지원자 상당수가 도망을 가버렸다고 한다. 윈난성 도독이자 교장이었던 탕지야오(唐继尧)는 겁쟁이 남학생들을 자극할 목적으로 부잣집 여학생 두 명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봉건사상이 남아 있던 중국에서 여성이 항공 교육을 받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듬해 4월 입학한 조선인 학생 4명 가운데는 여성인 권기옥도 포함되었다. 당시 중국 내 비행학교 네 곳 중 두 곳은 여성의 입학을 거부했고, 한 곳엔 비행기가 없었다. 경성에서 미군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돼 일본에 맞서겠다고 결심했던 권기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에서 받은 추천서를 들고 한 달간 대륙을 가로질러 서남단 끝자락 윈난에 도착한 것이다.

“비행사가 되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싶습니다.”

스물세 살 조선 여성의 용기에 탄복한 탕지야오는 입학을 허가했다. 


윈난항공학교에 입학한 여학생들은 남학생과 똑같이 머리를 깎고 체력 단련, 고공 훈련, 야외 훈련, 야간 비상 집합 등 혹독한 교육 과정을 완수해냈다고 한다. 1926년 권기옥은 마침내 윈난항공학교 1기 졸업생이 되었다.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의 탄생이었다. 중국인 여성 비행사도 아직 없던 시절이다.


가난한 망명정부가 비행기를 구입해 공군을 꾸릴 형편이 될 리 만무했다. 졸업 후 그녀는 중국군에서 비행사로 활동해야 했다. 1932년엔 상하이 사변에서 공을 세워 중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광복군 건군 작전 계획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항공편이 발달한 지금도 한국에서 여행 오는 사람이 많지 않은 윈난이다. 항일 투쟁을 위해 군사 교육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중국 서남부 끝자락까지 찾아간 독립운동가의 간절함은 상상조차 쉽지 않다. 관광객에겐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고산과 협곡도 귄기옥 여사에겐 비행 훈련이 쉽지 않은 험준한 자연환경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쿤밍에서 만난 독립운동가의 흔적은 그저 낭만적으로만 느껴졌던 윈난의 많은 것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권기옥의 졸업장(출처: 바이두)과 비행사 동료들과 함께 한 귄기옥(가운데, 출처: 국가보훈처)


피난지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길러낸 대학


윈난육군강무당과 함께 윈난이 자랑하는 명문 학교를 꼽으라면 국립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을 빼놓을 수 없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중국 3개 명문 대학이 피난지 쿤밍에서 꾸린 종합대학이다. 전쟁 중에 책과 실험 도구를 챙겨 동북부 연안에서 서남부 내륙까지 가다니,  이렇게 무모한 지식인의 대이동이 또 있을까. 그러나 겨우 8년 11개월 간 한시적으로 운영된 이 학교가 남긴 기록은 전란 중에도 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국의 대학 캠퍼스는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속속 일본군 수중에 들어갔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전시에도 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방침 속에 70여 개 대학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베이징의 국립 베이징대학(北京大学, 북경대학)과 칭화대학(清华大学, 청화대학), 텐진의 사립 난카이대학(南开大学, 남개대학)은 창사(长沙, 장사)로 옮겨 통합 임시 대학을 운영하게 되었다. 교수와 학생 1,600여 명은 화마를 피해 책과 연구 자료를 이고 지고 먼 길을 이동했다. 11월 1일 드디어 창사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말 수도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됐고, 창사에도 공습이 단행되었다. 포화를 피해 또다시 피난 여정이 시작됐다. 3개 대학 총장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는 1938년 2월 중순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3개 경로로 쿤밍까지 이동을 하기로 했다. 여학생과 교직원 가족, 체력이 약한 남학생은 기차로 광저우에 도착한 뒤 홍콩과 베트남을 경유해 윈난으로 갔다. 일부는 후난-구이저우 도로를 따라 구이린에 도착해 류저우, 난닝, 베트남을 통해 윈난에 진입했다. 베트남에서 윈난까지 이들을 실어 나른 것은 뎬웨철로(滇越铁路, 전월철로)였다. 


윈난서남대학 문과대, 법대 학생들이 멍즈 분교에 오가기 위해 탑승했던 뎬웨철로 비써자이 역


교수진과 남학생 250여 명은 군복과 일용품을 지급받아 도보 행군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폭격과 악천후 속에서 3,200리를 이동하는 대장정은 책으로 배우지 못했던 세상을 만나는 현장학습이었다. 가는 곳마다 누군가는 자연을 그리고, 누군가는 민간 문학을 수집하고, 또 누군가는 가난한 인민의 참상을 보고 기록했다. 68일간의 여정은 백면서생들의 인생관과 진로를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도보 행군 중 작성된 학생의 일기(왼쪽), 원이둬 교수가 구이저우에서 스케치한 건물(오른쪽)

윈난으로 옮긴 후 이름을 바꾼 국립 서남연합대학은 문과대, 이과대, 공과대, 상법대, 사범대 등 5개 단과대 26개 과를 설치하고, 1938년 5월부터 공식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쿤밍 지역 학교와 사원 등 이곳저곳 건물을 빌려 이용했는데, 일부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지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대규모 황무지를 매입해 시작한 학사 건축은 완공에 1년이나 걸렸다. 물가는 오르고 건축 자금도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면적이 넓은 도서관과 식당 두 곳만 벽돌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고, 나머지는 모두 흙벽에 양철 지붕을 올린 단층 건물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 창문엔 유리도 끼우지 못했다. 전쟁 후반에는 운영비마저 부족해 양철 지붕까지 뜯어 팔고 초가지붕을 올려야 했다. 도서관은 비좁고 공부할 곳은 마땅치 않았다. 학생들은 학교 앞 찻집에 가 저렴한 차 한 잔을 시키고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수시로 들락 거려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역 주민은 이렇게 학생들의 보이지 않는 후원자였다.


양철 지붕을 얹은 교사, 돈이 없어 창문엔 유리도 끼우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 중에 미어터지는 도서관(오늘쪽 아래)


개교 초기, 쿤밍에 공간이 부족해 멍즈에도 분교가 설립되었다. 문과대와 법대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멍즈 해관, 거루스 양행 등 옛 건물이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당시 지역 유지로 푸뎬은행 부행장이자 거비스 철로 부책임자였던 쩌우보자이(周伯斋)는 자신의 저택을 흔쾌히 내어주었다. 이곳은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건물이 높고 바람이 강해서, 여학생들은 밤마다 바람 소리에 잠을 설치며 향수병에 시달려야 했다.  


멍즈 분교로 사용된 거루스양행 건물(왼쪽)과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주가옛집(오른족). 둘 다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당시 학생 기숙사(왼쪽, 재현)와 경영난으로 양철 지붕을 뜯어 팔고 초가집으로 변한 학교 건물(오른쪽)


피난지에서의 생활은 빈곤했다. 교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시인은 밤에 도장을 팠고, 물리학자는 비누를 만들고, 교수 부인은 빵을 구워 팔며 생계를 꾸렸다. 형편이 어렵다고 학업이 등한시되는 일은 없었다. 교실이 부족하면 교수들은 학교 근처에 얻은 집으로 학생들을 불러 모아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전쟁 같은 교육이었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 덕분일까? 전쟁통 피난지에서 단 8년간 운영된 임시 대학은 과학, 문학, 정치 등 각계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다. ‘약한 상호작용에 의한 홀짝성의 비보존 이론’으로 중국에 최초의 노벨상을 안긴 물리학자 양전닝(杨振宁, 양진영), 리정다오(李政道, 이정도)도 그 중 하나다. 노벨상 수상 당시 이들의 나이는 겨우 37살, 31살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학이라는 것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큰 스승이 있는 곳이다.”

서남연합대학을 이끌었던 칭화대 총장 메이이치(梅贻琦, 매이기)가 남긴 명언은 아직도 큰 울림을 준다. 서남연합대학 교수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0세기 중국의 대표 철학가 펑유란(冯友兰, 풍우란), 모옌보다 먼저 노벨문학상을 받을 뻔 한 작가 션춍원(沈從文, 심종문), 중국 원자탄의 시조 자오충야오(赵忠尧, 조충요), 신월파 대표 시인 원이둬(闻一多, 문일다) 등 중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들이 당시 서남연합대학 교수였다. 서남연합대학 80주년을 맞은 2018년, 멍하이 차창은 기념판 푸얼차를 출시했다. 위대한 스승의 감동적 이야기를 담아 거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 ‘대사시대(大师时代)’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 8월 3개 대학은 모두 본교로 돌아갔다. 서남연합대학 사범대학만이 쿤밍에 남아 독립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가 바로 취후공원 북쪽에 있는 현재의 윈난사범대학이다. 캠퍼스 안에는 서남연합대학 박물관과 옛 교실 등 유적이 남아있다. 학교는 70여 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전쟁 중에도 중국 교육과 문화의 명맥을 유지하며 최고의 인재를 길러낸 명문대의 자부심은 여전히 그곳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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